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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23 조회수1,008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Knowing what was happening his relatives
came to take charge of him:
"He is out of his mind," they said
(Mk.3,21)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복음 마르 3,20-21
 
오랫동안 냉담을 하고 있는 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딸에게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제발 부탁이다. 딱 한 번만 나와 함께 성당에 가자.”

딸은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바람을 한 번 채워드릴 생각으로 허락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데 성당에 가면 뭐해.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데 시간만 아깝지.’라고 생각하면서 이번을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습니다.

미사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신다고 성당에 들어가셨고, 자신은 미사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성당 휴게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흉보는 소리가 들리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어떤 분이 자기 자식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휴게실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어떤 자매 두 사람이 큰 목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화가 난 그녀는 성당에 들어가 집에 가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흉보고, 자기 자랑 하고, 여기에 다투기까지 하는데, 이런데서 무슨 미사가 의미 있느냐면서 말이지요. 그 순간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생 성당에 다니면서 주님만 봤는데, 너는 딱 하루 성당에 와서는 참 많은 것도 봤구나.”

그 순간 딸은 크게 반성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는 수준과 어머니가 보는 수준은 크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자기 수준만큼 보인다고 하지요.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주님이 보이는 것이고, 세상에 가까운 사람은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세상만 보일 뿐입니다. 가까운 것이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잘 모르겠다면 지금 내게 보이는 것들을 따져보시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짓된 행동이 많이 보이면, 내가 거짓과 가까이 하는 것이지요.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면, 미움 등의 부정적인 것들과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행동이 많이 보이면, 그만큼 내가 사랑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면, 나 역시 기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반대자였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는 소문을 내지요.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 소문은 정말로 강력한 힘이 있었나 봅니다. 글쎄 예수님의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하는 친척들조차 이 소문을 듣고 주님을 붙잡으러 나설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도 있고, 또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귀 들렸다는 소문에 붙잡으러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말과 행동을 가까이 하기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것들이 보이십니까? 주님만이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나는 많이 보고 적게 말하고 더욱 적게 행동한(J.헤이우드).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내 이웃을 새롭게 바라보세요.

우리는 나의 이웃을 늘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이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면, 또한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눈길로 본다면, 그리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생각으로 바라본다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시선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마르 10,21)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죄나 허물을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의 마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의 이웃들을 향해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롭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한 사건을 바라보면서 현재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 짓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이웃을 새롭게 바라보면 어떨까요? 특별히 그 이웃 너머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으로 우러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을 느낄 수도 또한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다윗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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