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29 조회수1,080 추천수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What is the kingdom of God like?
To what shall we compare it?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scattered upon the soil.
But once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the largest of the plants in the garden
and even grows branches so big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take shelter in its shade."
(Mk.4,30-32)
 
 
제1독서 2사무 11,1-4ㄱㄷ.5-10ㄱ.13-17
복음 마르 4,26-34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 선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를 찾아서 어디든 갈 수가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서 떠났을까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많은 노예들은 예전처럼 주인을 모시면서 자유 없는 노예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의 자리에 계속 머물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상태가 주는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는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는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좋은 의지보다는 부정적인 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현재의 고통과 시련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맙니다. 이러한 의지를 가지고서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항상 입에 어렵고 힘들다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저는 올해 초에 강화도에 있는 갑곶순교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이곳의 초대신부로 있다가 10년 만에 다시 갑곶순교성지에 오게 된 것이지요. 인사이동 전에 솔직히 겁이 좀 많이 났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커진 규모, 더불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에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가 발령받았던 곳을 하나하나 따져보니 어려움이 없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임기를 마쳤을 때의 제 모습을 보니 항상 조금 더 성장했었음을 깨닫습니다.

피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은총을 받는 은혜로운 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생기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에 좋은 의지를 심을 때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좋은 의지가 어떤 결과를 낼 지는 주님만이 아실뿐,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땅을 성실하게 잘 가꾸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곡식이 자라나 익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얻는 것처럼, 좋은 의지를 심을 때 분명히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좋은 결과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은 의지를 내 마음에 심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인내는 한 번 뛰는 장거리 경주가 아니다. 숱한 단거리 경주의 연속이다(월터 엘리어트).


인천교구의 역사가 담겨 있는 갑곶 전시관.

 

나를 위해 우시는 주님

어느 신부님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자매님께서는 고해성사를 보면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어렵고 힘든 상황을 사제에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해사제가 훈화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우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우시겠구나.”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때 아무런 감정 없이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길로 가길 간절히 원하시면서 울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답니다.

말로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위로는 입으로 내 뱉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공감하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내 자신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함께 했었는지를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사람들과 만났을 때 너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우리를 위해 울어주시는 내 안의 하느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살기 힘든 곳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가장 살기 좋은 곳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우시는 주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