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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회개를 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2-17 조회수840 추천수5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설교에 회개한 니네베 이들과 당신 시대의 군중을 견주신다. 니네베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이다. 그러니 그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이다. 요나는 그런 원수들에게 예언하고 싶지 않아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그곳에서 단 하루만 걸으며 “이제 사십 일 후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한다. 그런데 이 소극적인 외침에도 그들은 곧바로 회개한다. 그것도 임금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자루옷을 입고 하느님 자비를 청한다. 참 적극적인 회개이다.

 

예수님 시대의 그 군중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니네베인과 다른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인들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요나와 달리 매우 적극적인 선포에 여러 표징까지 보여 주셨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도 제대로 듣지 못하였고 표징을 보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해 표징만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아무 표징도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요나 예언자의 표징만은 주어지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표징 요구를 거절하시는 것은 당신만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리라. 사람들에게 요술이라도 보여 주어서 그들이 꼭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만 할까!

 

요나의 표징은 요나가 주님의 사명을 피해 타르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내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가두셨다가 육지에 뱉어 내게 하시어 결국 니네베 인들에게 하느님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던 이야기이다. 니네베 인들은 요나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하였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셔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구약의 예표이기도 하단다. 당신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오셔야만 이 세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할 것인가?’라는 그분의 안쓰러운 한탄이 배어 있는 대목일 게다.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 보여 줄게 이런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는 말씀에는 마치 부모들이 ‘내가 죽어야 저 아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라며 한숨짓는 것과 같다. ‘악한 세대’란 철저하게 ‘잘난’ 이들의 계층일 게다. 자신이 가진 알량한 지식, 사회적 신분이 오히려 철저하게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 자신들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착각할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빈 쭉정이일 수도.

 

그렇지만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같은 표징을 요구한다. 그렇게 해 주시면 믿겠다고 흥정하잔다. 그런 모습은 지금도 있다. 그러기에 기적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인다. 기적을 확인하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건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이야기하신다. 그가 연출한 니네베 인들의 회개를 ‘기적의 일’로 보라는 거다. 이는 회개가 먼저임을 뜻한다. 새 마음으로 기도와 성사생활을 한다면야 기적은 만나게 되리라. 호기심만으로는 결코 만날 수가 없단다. 기적은 주님께서 주시기에.

 

사람들은 ‘현대판 솔로몬’을 찾는다. 물질을 앞세워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이를 찾고 있다. 하지만 ‘그런 솔로몬’은 일체 존재하지도 않는다. 욕심에서 조금만 물러선다면 솔로몬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을 만날 수 있는데 그걸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참조)”라고 외친들 허사다. 기적은 정성의 결과이니까.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심혈을 기울이면 ‘기적적인 일들’은 일어날 게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이기에. 정성을 망각하기에 욕심에 빠진다.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이 그야말로 진정한 ‘가장 큰’ 기적이리라.

 

니네베 인들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회개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에. 그러므로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은총이다.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살아 있음’은 분명 축복이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하늘의 표징만을 찾으란다.

 

우리는 편하게 주님을 모신다. 언제든 갈 수 있는 성당이 있다. 신앙의 선조들은 미사와 영성체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른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고통을 각오하며 찾았다. 그들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여유롭다. 돌아볼 게 참 많다. 그래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예로 든 요나의 이야기는, 회개를 해야만 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게다. ‘니네베 인들을 본받자.’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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