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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2-23 조회수1,402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2월 23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have taken their seat on the chair of Moses.
Therefore, do and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they tell you,
but do not follow their example.
For they preach but they do not practice.
(Mt.23,2-3)
 
 
제1독서 이사 1,10.16-20
복음 마태 23,1-12
 
현재 제가 있는 곳은 강화도의 갑곶순교성지입니다. 10년 전, 이곳 성지의 초대 신부로 발령 받았던 곳을 올해 다시 오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남다른 감회에 젖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예전에 땀 흘리며 심었던 나무들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납니다. 당시에 심었던 나무들 중에서 특히 신기한 것이 바로 ‘벚나무’입니다.

워낙 갑곶성지의 땅이 척박해서 웬만한 나무를 심어도 잘 자라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무를 잘 아는 신부님께 부탁을 해서 심은 나무가 바로 ‘벚나무’입니다. 이 벚나무를 심으면서도 과연 이 나무가 잘 자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갈이 많아서 땅을 깊이 팔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수도관이 없어서 나무를 심은 곳에 물을 일일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벚나무를 심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세워놨다는 것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하나도 죽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문득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해봅니다. 10년 전, 억지로 자기를 이런 땅에 심었다면서 저를 향해 불만이 참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자라라고 여기에 심는 거야?’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이럴 바에는 날 그냥 죽여라 죽여!’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평불만도 또 포기도 하지 않고 열심히 잘 자라주었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 정착해서 예쁜 꽃을 피우면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쁨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 결 같이 서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도, 폭염 속에서도 묵묵히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저 역시 이 나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불편함에도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양 말하고 있는 나약한 마음, 약간의 불편함을 견뎌낸 것을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자랑하는 교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에 공감하면서도 내가 아닌 남이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 등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나무는 겸손함과 사랑을 가르쳐주는 현자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겸손함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길 원하십니다. 솔직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전해 듣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만 의무를 부과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의무를 짊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다 욕망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그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윗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주님 친히 겸손의 본보기를 보여주시지요. 그토록 위대하신 분이시건만 주님은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오셨고, 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무와 같은 멋진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물을 볼 때는 눈을 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장 프랑수아 밀레).


십자가의 길 제12처. 예수님의 죽으심.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넓은 시각으로...

어떤 책을 읽다가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싹수가 노랗다.’라는 속담과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안다’라는 속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싹수가 노랗다’라는 속담입니다. 잘 될 가능성이나 희망이 애초부터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속담이지요. 그런데 싹수가 노랗지 않은 싹이 있나요?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싹은 대부분이 노랗다는 것입니다. 이 노란 싹이 자라서 나무가 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사람 역시 이렇게 단정 짓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또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안다’는 속담입니다. 잘 자랄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잘 생각해보면 진짜는 아니라고 말하지요. 씨앗이 움트면서 최초로 나오는 잎을 떡잎이라고 하는데, 처음에 나온 이 떡잎이 비실비실 거려도 몇 백 년을 사는 나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괜한 속단으로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지 못할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의 길 제14처. 예수님의 묻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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