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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2-25 조회수861 추천수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2월 24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Mt.20-28)
 
 
제1독서 예레 18,18-20
복음 마태 20,17-28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천하절색으로 천하의 영웅이라고 하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서 이집트 왕국을 20년간 꿋꿋하게 지켜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클레오파트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최고 미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미인이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만들었다는 로마의 동전에서 그녀는 매부리코에 살이 쪄서 도톰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코는 당시의 이상적인 로마 미인과 비교할 때 더 길었으며, 당시 미인의 기준인 하얀 피부가 아닌 검은 피부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하의 영웅들을 유혹한 것일까요? 그녀는 책을 많이 읽어 교양이 풍부한 것은 물론, 외국어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세련된 매너와 화술로 도저히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아니라, 지성이 조금만 낮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과 지성을 상징하는 ‘앎’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단순히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에 반해서 앎은 세상의 역사를 바꿀 만큼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대한 앎은 어떨까요? 이 세상을 마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시간은 무한의 시간으로 지금의 시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한의 시간을 함께 보낼 주님께 대한 앎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외적인 부분만을 신경 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특별한 은혜를 청하는 두 명의 제자들과 그 어머니를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들만의 특별한 은혜를 청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주님의 양쪽 자리를 차지하는 은혜를 청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제자에게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지시지요. 미리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쟁은 신나는 일에 불과한 것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죽음의 시련은 별것 아닌 일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알도록 더욱 더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보다는 주님께 대한 앎이 훨씬 나에게 유익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착각의 하나는 현재는 결정을 내리기엔 가장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일 년 중의 가장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명심하라(에머슨).


십자가의 길 제1처. 예수님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나부터 제대로 압시다.

예전에 어떤 식당에서 말다툼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식사를 겸해서 한두 잔 하다가 말다툼이 생겼나 봅니다. 처음에는 아주 분위기가 좋았지만, 어떤 문제 때문인지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별 것도 아닌 문제인데 왜 화를 내는 거야?”

그러자 그 당사자로 보이는 분은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라고 답하면서 더 화를 내십니다. 솔직히 제3자인 제가 보기에도 분명히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분은 화를 낸 것일까요? 화를 내지 않은 것일까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기에 화를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절대로 조절할 수가 없기에 더욱 더 화를 낼 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던 철학가의 말처럼,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을 모른다면 절대로 지금의 잘못된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지요.

나부터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겸손의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함으로 주님을 알게 되어 내 안에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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