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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2-25 조회수1,163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2월 2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Lk.16,31)
 
 
제1독서 예레 17,5-10
복음 루카 16,19-31
 
어렸을 때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복사단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에는 꽤 낯익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지금은 노년의 신부님이시지만 당시 보좌신부님으로 함께 해주셨던 신부님의 얼굴도, 지금 같은 교구에서 함께 사목활동을 하는 선후배 신부님의 얼굴도, 또한 가끔 동창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후 전혀 만나지 못했던 얼굴이 참 많더군요. 당시에는 정말로 친한 선배고 친구였는데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보고 싶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전혀 연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을까요? 그저 추억의 한 장이 되고만 사진 속 인연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기만 합니다.

그 누구도 지금의 만남에 대해서 영영 못 만날 것을 예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또 못 만나더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연은 추억 속의 한 장으로 사라질 수도 있지만, 소중한 만남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잘 가던 가게가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신학생을 위해 때로는 공짜로 해주시기도 하고, 싼 가격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어느 날 가게를 접었고 성당에서도 더 이상 뵐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분과의 인연도 멈춘 것인가 싶었지요. 그러나 10년이 지나서 신학생 때의 만남을 사제가 되어 다시 이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분께서는 건설 쪽 일을 하시고 계셨고, 갑곶성지 초대신부로 왔을 때 저를 도와 많은 일을 해주셨지요. 신학생 때의 인연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인연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단지 스스로가 그 인연의 끈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소중할 수 있는 만남을 더 이상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인연이 악연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 때문에 만남 자체를 멀리하면서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면 단 한 명의 좋은 인연도 생길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최악의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라자로였지만,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갔을 때에는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서 부자가 고통 속에서 힘들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자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을 착취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온갖 비리를 저질러서 부를 축척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형제가 자신처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라자로를 형제들에게 보내달라는 것을 보니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지극한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불붙는 지옥에서 고초를 겪는 것은 왜 일까요?

단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자기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와의 만남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소중한 인연이기에 어떤 만남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나는 모든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만이 불붙은 지옥불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아프리카 속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복사단 소풍 사진

 

진화

사랑니는 새로 나올 때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아프다하여 ‘사랑니’라는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이 사랑니는 치열의 맨 안쪽 끝에서 나기 때문에 관리가 어렵고 그로 인해 다양한 질환을 일으키게 되지요. 그래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사랑니를 뽑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저 역시 4개의 사랑니가 났고 모두 뽑았습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서 약 7%는 사랑니가 아예 없다고 합니다. 워낙 필요 없는 치아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진화가 된 사람은 사랑니가 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진화가 덜 되었나 봅니다. 진화를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생물의 종 및 더 상위의 각 종류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해 온 것.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하여 감.’

결국 한 차원 높아지는 것을 진화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생각해봅니다. 원숭이와 같은 모습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가 단지 신체적인 진화뿐일까요? 아니지요. 여기에는 내적 진화도 같이 동반됩니다. 동물들처럼 양육강식이 주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는 내적 진화 역시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과연 잘 진화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하느님께 ‘진화가 덜 되었군.’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주신 그 모든 말씀들과 행적들은 바로 우리의 영적 진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영적 진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는 데에만 신경 쓰다가는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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