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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용서만이 진정한 평화를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01 조회수693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남이 나를 ‘섭섭하게 했던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하지만 남이 나를 ‘고맙게 했던 일’은 어느새 잊는다. 남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일은 오래 기억한다. 하지만 남에게 ‘상처 주었던 일’은 까맣게 잊는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네 인생살이요 삶이다. 지금도 아무리 노력해도 크나큰 아픔과 상처를 준 이를 지금도 용서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우리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으려면 우리도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한다. 미움과 복수심은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통만을 가중시킬 것이기에.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의 연방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테러 사건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큰 참사였다. 이 범인은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많은 언론이 사형이 집행된 이후 이를 지켜본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인터뷰를 소개했다.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하나같이 무엇인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느낌과 허무한 마음뿐이었단다. 또한 후련해질 것으로 기대한 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나. 이는 우리에게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나 처벌이 자신이 받은 상처의 치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잘 말해 준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오직 용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기에. 죄인인 우리를 주님도 먼저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미루어 온 용서를 주님께 청하자.

 

또한 남에게 도움 받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는 말자.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으리라. 다른 이를 원망하는 일도 적어질 게다. 그만큼 삶이 풍요로워지는 걸 느낄 것이다. ‘인생은 고마운 일만 기억하고 살기에도 너무나 짧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큰 아픔을 받아 상처만 남은 것은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야 하리라. 미운 마음 역시 그렇게 그분께 함께 드리자. 붙들고 있을수록 자기 마음만 불쌍해 질 뿐이다. 무엇보다도 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그것이 용서의 출발이다. 용서받고 싶은 것만큼 꼭 용서하자.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 행위이다. 용서받는 일도 은총이지만 용서하는 일은 더 은총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용서받지 못해서, 용서하지 못해서 고통 받고 있을까? 예수님도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십자가 죽음을 택하셨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용서가 어려운데,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용서해야 할 이만 생각하면 사실 용서가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면 용서할 게다. 우리가 용서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 시건방진 생각의 뿌리는 그분에 대한 ‘교만’에서 나오기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 실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자 했다. 도대체 언제쯤, 어디서 평안한 마음으로 용서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은 죄’를 용서받고도 동료의 작은 작은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남이 베푼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이리라.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유혹이다. 주님께서 주셨기에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보아야 할게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틀’에 맞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대로 실천하라신다. 우리는 분노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것을 발전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용서의 법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새겨 놓으신 계약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하신 것을 이웃들에게 베풀면서 이제 내 자신이 이 계약을 확증해야 한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나에게 그와 같이 곡 하실 것이기에.

 

어떤 대가로 베푸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을 게다.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들의 신앙은 오히려 정화되었다. 빈손으로 하느님께 갈 수밖에 없었기에. 하느님의 용서는 무엇을 바쳐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스스로 낮추며 뉘우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일 게다. 하느님께 무엇을 많이 바쳐야만 한다는 생각은 과감하게 떨쳐 버리자.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어느새 기복적이며 이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스며들었다. 하느님은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랑으로 준 선물에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가엾은 마음일 게다. 이렇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입고 회개하여 형제들을 향해 가 ‘마음으로부터’ 서로 용서하는 것일 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가 자라나 큰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시리라.

 

이 시각 못다 한 용서를 한번 되돌아보자. 베드로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그 많은 일곱이 아닌, 단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한 게 우리 주위에 수없이 널려있다. ‘네가 먼저’라면서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라며 용기를 갖고 용서를 청하자. 그 마무리는 주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다. 용서받은 일도 용서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다 평화이다.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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