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06 조회수1,264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3월 6일 사순 제4주일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no longer deserve to be called your son.’
But his father ordered his servants,
‘Quickly bring the finest robe 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ake the fattened calf and slaughter it.
Then let us celebrate with a feast,
because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again;
he was lost, and has been found.’
(Lk.15,21-22)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제2독서 2코린 5,17-21
복음 루카 15,1-3.11ㄴ-32
 
지난 동창 모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동창 신부가 저를 향해 “네가?”라면서 강하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저의 모습과 친구가 기억하는 저의 모습이 정반대였던 것이지요. 그 당시의 저를 스스로 생각하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힘들어했고, 심지어 독서를 읽을 때에는 벌벌 떨어서 당시에 읽었던 성경책에는 사선 표시가 잔뜩 그어져 있지요.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힘들어서, 사선을 미리 그어놓아서 숨을 쉬는 순간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저였는데 친구들이 기억하는 제 모습이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스스로 생각하는 제 모습이 분명히 맞습니다. 그런데 저를 다르게 생각하는 친구들의 모습도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문제는 자신에게는 전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단정 짓는 것, 또한 할 수 없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도 어느 순간 가능한 상황이 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경험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을 기억하기보다는 불가능했던 상황만을 기억하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강의 때에 이런 작업을 지시합니다. 스스로를 새롭게 규정하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규정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부터 나는 ~~~ 사람이다.’라고 확실하게 규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지금부터 나는 ~~ 사람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능성만 열려고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 자신 있게 규정내리는 사람만이 그 가능성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아주 유명한 탕자의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탕자인 작은 아들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정말로 못된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도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말하고, 또한 다른 고장에 가서는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합니다. 이런 행동들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까요? 재산을 탕진한 것에 심한 기근까지 들어서 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버지께 지은 죄가 있어서 고향에 돌아갈 염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고 뉘우칩니다. 이 뉘우침을 통해 다시 아버지께 돌아갈 결심을 하고, 실제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 결과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다시 받아주는 것은 물론 큰 잔치까지 벌인다는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이 못된 아들을 다시 받아주고 또 잔치까지 벌였을까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갖추기가 힘듭니다. 생각해 보세요. 잘 되어서 고향에 다시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열 수 있지만, 쫄딱 망해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는 분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 큰 사랑을 통해서 용기를 내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마음의 변화가 필요할까요?

권태를 느끼는 것은 타인이 주입한 방식으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권태를 느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좋은 신호다(오쇼 라즈니쉬).


렘브란트의 '잃었던 아들'

 

나의 위치는 어디쯤 있나요?

여러분의 삶과 작은 아들을 비교하면서 지금의 내 위치가 어디쯤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 집에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 아버지 곁을 떠나기 전의 상태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2. 아주 먼 도시에 있다: 아버지 곁을 떠난 상태, 신앙생활을 쉬는 모습입니다.

3. 희망을 잃고 고통 받고 있다: 신앙생활이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공허함과 함께 삶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4.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다: 다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5. 집으로 돌아오고 있지만 아버지의 환영을 받을 지가 걱정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죄를 지은 내가 과연 다시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 염치없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깁니다.

6. 방금 도착했고 기분은 매우 좋다: 뜻밖의 편안함을 얻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용서의 은총을 얻습니다.

7. 송아지 고기와 잔치를 즐기고 있다: 다시 시작하는 신앙생활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지금의 내 위치는 어디쯤입니까? 지금의 내 위치를 알아야 앞으로 할 일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오늘과 내일의 빠다킹 신부 일정

3/6(주일) 11:00 갑곶성지 주일미사

3/6(주일) 인천 간석4동성당 예비신자반 피정 강의

3/7(월) 11:00 갑곶성지 평일미사(새신부 11명과 함께 하는 첫미사)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