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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떻게 죄 짓지 않게 되는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13 조회수1,395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6년 사순 제5주일


< 다시는 죄짓지 마라
>


복음: 요한 8,1-11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안젤리코 작, (1450), 프레스코, 169x134 cm,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어떻게 죄 짓지 않게 되는가? >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시는 오늘 복음말씀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하려고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참 죄인이고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죄인의 처지에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를 좀 더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용서받게 되는지를 순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용서받을 수 있는데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나 거기서 흘리신 피가 외적으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당신도 그들 중의 하나처럼 심판을 포기하시는 듯 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하지만 용서에 관한 복음이라면 반드시 그 죗값인 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오직 피만이 인간 안의 양심의 죄책감을 말끔히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히브 10,22)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양심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삶이 변화되지 않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약의 동물의 피로써 대사제가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가 들어있는 궤의 뚜껑인 속죄판에 그 피를 바르며 죄의 용서를 청했던 모습입니다. 우리 양심은 동물의 피로써는 우리 죄를 용서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피가 하느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인 우리 마음의 양심 뚜껑에 뿌려지지 않는 이상 양심의 가책은 잠재울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의 죄의 용서는 바로 양심의 질책을 완전히 잠재우는 일입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의 가방을 뒤져 친구의 시계를 훔쳤는데 시계를 가지고 있으면 들킬 것 같아 방과 후에 가져갈 생각으로 학교 뒤뜰에다 묻었습니다. 교실로 돌아오는데 손에 흙이 묻어 수돗가에 가서 손을 씻었습니다. 교실에 돌아온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먼저 들어와서 아이의 행동을 다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선주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선주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널 용서할 수 있단다. 그렇지만 선주야, 네 손에 묻은 오물은 물로 씻어 내렸지만, 네 양심에 묻은 오물은 어떻게 씻어내지?”

선주는 시계를 다시 친구의 가방에 넣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선주는 그 후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가책을 없애는 방법은 죗값을 치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범한 죄를 다시 회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신 깨끗한 피로써 대속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고해성사를 하며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겼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그 죄를 반복한다면 그 죄가 완전히 씻긴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의 자녀의 팔을 잘라야한다면 다시 그런 죄를 지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매번 그리스도를 우리 죄로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또 죄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양심의 가책이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으니 그 가책을 잊기 위해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왕자가 어떤 별에서 만난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매일 술을 마시는 이유와 같습니다. 어린왕자가 주정뱅이에게 묻습니다.

뭐하세요?”

술을 마시고 있지.”

술은 왜 마시는 거예요?”

잊기 위해서지.”

뭘 잊기 위해서요?”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

뭐가 부끄러워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럽지.”

 

이 사람이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가 죄를 끊지 못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술을 끊기 위해서는 부끄럽게 만드는 양심의 가책이 먼저 끊어져야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다 덮어주었으니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기 이전까지, 그리고 그 말을 가슴깊이 믿을 수 있기 전까지는 술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아담이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가책을 덮기 위해 하와를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어린양을 죽여 그 가죽으로 우리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음을 진정으로 믿어야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죄를 지우기 전까지는 죄의 반복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죄가 씻겼다고 믿게 되면 그 믿음이 그를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어떤 두려움도 그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마을의 겁 많은 호랑이가 3일 동안 굶어 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마침 어떤 토끼가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토끼 뒤를 쫓으며 말했습니다.

어흥~널 잡아먹겠다.”

토끼가 멈추더니 호랑이 눈을 똑바로 째려보며 말했습니다.

이기 미쳤나!”

호랑이는 충격을 먹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호랑이가 너무 배가 고파 꼭 오늘은 그 토끼를 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흥~널 잡아먹겠다.”

나야, 임마!”

또 호랑이는 충격을 먹었습니다. 다음날 굶어죽기 직전 이번엔 꼭 잡아먹겠다고 각오를 하며 나갔습니다.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다행히도 그 토끼가 아니었습니다.

어흥 ~널 잡아먹겠다.”

그러자 그 토끼도 눈을 치켜뜨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문 다 났어, 임마!”

 

우스갯소리지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받은 사람도 위의 토끼와 같이 됩니다. 어떤 두려움도 나를 다시 죄에 옭아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4)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았다고 진정으로 믿었다면 간음한 여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 피의 효과가 그 양심까지 적셔주지 못했다면 그 여인은 또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죄를 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굳지 묻지 않으시는 이유는 당신 피로 죄가 씻겼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이후의 행위를 보면 자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장면이 나오나요? 상징적으로는 나옵니다. 바로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시는 장면입니다. 땅은 죄를 상징합니다. 뱀이 흙을 먹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에 당신 거룩한 손가락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쓰이고 그 말씀 덕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 쓰시는 장면은 하느님께서 돌판에 당신 손가락으로 계명을 새겨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법이 양심에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금송아지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돌을 들고 있는 바리사이들이고 우리 내면에서는 바로 나를 질책하는 자아이며, 그 깨어지는 돌판이 인간의 몸에 성령의 손가락으로 쓰여진 말씀, 즉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우상인 송아지를 없애기 위해 깨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어 다시땅에 무언가 쓰시는데, 바로 하느님께서 우상이 사라진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그들 심장 안에 하느님의 법인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려고 다시계명판을 만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갈아서 마십니다. 그렇게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은 첫 십계명판의 깨어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금송아지가 바로 지금까지 양심을 괴롭히고 있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 금송아지를 갈아서 먹게 되면 더 이상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그 돌을 내려놓고 떠나가게 만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였다면 죄인인 여인의 마음엔 이제 감사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이 양심에 새겨진 법만을 따르려는 욕망이 솟구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그 여인에게 돌을 들고 있는 금송아지들인 바리사이들을 몰아내고 그녀 심장 안에 당신의 법인 더 이상 죄짓지 마라를 새겨주십니다.

 

바벰바(Bemba)족은 아프리카 잠비아 북부의 고산지대 화전민 부족입니다. 이 부족은 범죄율이 아주 낮아,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습니다. 연구해보니, 그 비결은 마을에서 일탈행위자나 범죄자가 생기면, 역발상으로 부락민들이 그 사람을 칭찬하는 공개 릴레이를 하는 기발한 의식에 있었습니다. 부족 중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데려다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일을 중단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장에 모여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이루어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한마디씩 외칩니다. 그 내용은,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입니다. 그의 장점, 과거 선행 등이 하나씩 열거됩니다.

이 사람은 지난번에 우리 가족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어요.”

저번에는 실력을 발휘해 큰 사냥을 성공으로 이끌었어요.”

지난번 마을에 일손이 필요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섰답니다.”

어린 아이까지 빠짐없이 말합니다. 과장이나 농담은 금지됩니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합니다. 판사도 검사도 없고 변호사만 수백 명 모인 법정과 같습니다. 아무도 문제 인물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걸쳐서 칭찬의 말을 바닥이 나도록 다하고 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 놀라운 칭찬 폭격은 죄짓고 위축되었던 사람의 마음을 회복시켜주고,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눈물겨운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이 부족에는 범죄행위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은 참소하는 일만 합니다. 죄를 지은 첫 조상들이 그러했고 의인 욥을 보고 하느님께 그러했으며 유다가 그리스도를 참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참소하는 이의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오늘도 그러하셨고 영원히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변호입니다. 내 자아가 그건 네 탓이야!” 할 때도 그리스도의 피는 내가 다 죗값을 치렀으니 이젠 누구의 탓도 아니야!”라고 변호하실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양심을 자유롭게 해 주는 변호자이기 때문이 인간이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요한 2,1)

 

그분이 나의 죄를 변호해주시기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 더 이상 나를 억누르던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고 깨끗하여져서 이젠 그분께 무엇을 해 드릴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자캐오처럼 자신의 재산 절반이라도 당장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분의 사랑에 반하여 다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우리 마음 안의 바리사이들을 물리치시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이를 믿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그분의 피가 우리 양심 위에 발라질 것이고 그러면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오늘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 거룩한 목숨을 우리 더러운 땅에 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는 바로 죄를 짓지 않고 있는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을, 혹은 누군가를 단죄하는 나의 자아가 그분의 피로 내 안에서 사라졌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양심이 자유로워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분의 피가 내 자아를 불살라버리고 그 피가 내 양심에 발라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의 가책에서 벗어나 다른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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