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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1)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14 조회수925 추천수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6313/주일복음말씀묵상(2독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1)

(필리3,8-11)

 

 

필리3,8-11절은 “(8)또한 내가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함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느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오늘 본문 필리3,8-11절은 그리스어로 하나의 긴 문장이다. 이것은 계단과 같이 우리를 점점 더 높이 이끌어 3,11절에 있는 정점에까지 이르게 한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바오로의 고백은 그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났을 때의 충격에 기인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실재를 만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변했다! 바오로가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체험이 바로 가장 탁월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렐루야!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느님의 율법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긴다. 바오로 역시 자기의 유대적 출신과 율법 아래서 자기의 흠 없는 삶에 관한 자랑거리를 열거하고 있다(필리4-6). 바오로는 그의 율법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의 엄격한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실재를 만난 후부터 그가 전에 유익한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이제는 해로운 것으로 치부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장점으로서 그가 신뢰했던 모든 것이 하느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았던 장애물이었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친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이른바 율법의 성취에 바탕을 두는 행위, 곧 자기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의,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빈손을 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시는 의이다(9).

 

이스라엘은 이 율법과 그것이 선포하는 의를 열성적으로 추구했으나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이 약속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약속은 행위에 나타난 경건한 공적(功績)에 따라 유효한 것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따라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서 거부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그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시고 완성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기꺼이 수용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행위로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본래적으로 율법은 완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사함을 위해서는 믿음으로 하느님께로 돌이켜야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걸림돌인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기대를 따라주지 않으셨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다! 로마10,1-4절에 의하면 바오로는 하느님을 향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열심이 빗나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열심이 구원을 이루는 하느님의 신실성, 곧 하느님의 의를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쓴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는 행위(功績)에 근거하여 획득하려고 요구하는 의이다(9). 이것은 율법을 구원의 길로 곡해한 것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안에서 이러한 곡해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누구나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하느님을 옳다고 시인하고 그 목표에 도달한다! 곧 그 사람은 하느님이 이루시고 선물하시는 의에 이른다(9)!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행위 안에서 아주 개인적으로 영접함을 받고, 그리스도를 얻고(8)”, “그분 안에서 발견되고(9)”, “그분을 알고(10)”,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과 깊이와 어떠함에 침투되어 영향을 입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그 목표점인 하느님의 형상에까지 이르게 된다(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린 그분의 부활 생명을 가리킨다(에페1,19-20).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 곧 부활이 능력의 실재는 성령이시다(로마1,4). 이 능력을 알고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어야 하고(로마6,6-11),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죽음은 부활의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해야만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음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다. 이를 위해 카네이션 씨를 예로 들어 보자! 카네이션 씨는 매우 작지만 카네이션을 성장시켜 꽃을 피울 수 있는 생명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이 씨 안에 이미 생명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성장의 능력이 생기도록 밖에서 무언가를 더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다만 그 씨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그 씨는 꽃을 피우기 위해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 죽음을 거칠 때 그 껍질은 깨질 것이며, 생명은 높은 데로부터가 아니라 씨 속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씨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씨는 하느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 안에 심겨져 있다! 이 씨는 거룩한 생명을 포함하며, 이 생명이 바로 부활 생명이다(1요한3,9).

 

부활 생명이 씨 속에서부터 해방되려면 씨의 바깥 껍질이 깨져야만 한다! 이것은 반드시 고난을 요구한다! 우리 존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생명의 씨는 그 부활 생명의 능력이 씨 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겉 사람()이 깨어진다면, 우리 속사람() 안의 씨가 생명 능력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음이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에 의해 살기 위해 그의 인간의 생명을 계속적으로 죽음에 넣은 것을 말한다(요한6,57).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두 생명, 곧 하느님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계셨다. 사람이신 예수가 그분의 인간의 생명을 수단으로 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갈망이었다! 하느님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생명만을 사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느님의 의도는 예수께서 인간의 생명의 통로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의 끝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분의 이 땅위에서의 온 생애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증명된다! 그분의 생활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내기 위하여 인간의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었다! 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생활은 얼마나 놀라운가!

 

이러한 놀라운 생활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본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연속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도록 그의 인간의 생명을 죽음에 넣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는 순교의 시간에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은 매일매일 우리의 삶속에서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직장이나 학교, 믿는 이들과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넣고 그 생명에 따라 살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넣는다면, 우리 안에 다른 생명, 곧 하느님의 생명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 일단 우리의 겉 사람, 곧 타고난 옛 생명을 죽음에 넣는다면, 속에 있는 새 생명, 곧 주님의 부활 생명이 이제는 방해받지 않고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게 될 것이다! 알렐루야!

 

뛰어난 부활에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가 점진적이고도 계속적으로 부활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첫 번째로 우리의 죽은 영을 부활하셨다(에페2,5-6). 다음에 그분은 우리의 영으로부터 우리의 혼과 죽을 몸까지도(로마8,11) 부활하도록 전진하신다(로마8,6). 영과 혼과 몸, 곧 우리의 전 존재가, 우리의 옛 존재로부터 그분의 생명에 의해서 그분의 생명과 함께 온전히 부활된다!

 

이것이 우리의 뛰어난 부활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경주해야 하는 생명 안에서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부활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이자 도착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삶으로써 이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는 옛 창조에서 새 창조로 놀라운 부활 안의 과정을 거친다!

! 그분으로 인하여 빛나는 주말이 되시기를! 알렐루야! 아멘

 

<본문을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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