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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19 조회수1,126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복음 요한 8,1-11
제2독서 필리 3,8-14
복음 요한 8,1-11?

 

 

도자기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와서 도자기 그릇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기 가방에서 그릇 하나를 꺼내고는 마음에 드는 진열된 도자기 그릇을 하나씩 부딪쳐 보는 것입니다. 점장은 이상한 이 행동을 보고는 “손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 남자는 “그릇을 서로 부딪쳐 보면 품질을 알 수 있지요. 좋은 그릇은 청아한 소리를 내거든요.”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가게의 도자기 그릇을 하나씩 부딪치며 소리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도자기 그릇의 소리를 들어본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별로입니다. 소리가 맑고 청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점장은 “그러면 제가 사용하는 그릇으로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라면서 그릇을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이 남자는 반신반의하면서 이 그릇으로 부딪쳐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주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탁한 소리만 내던 그릇이었는데 말이지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남자가 가져온 그릇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좋지 않은 그릇으로는 어떻게 부딪쳐도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었지요.

이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세운 기준이 잘못되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남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 이러한 잣대로 바라보니 모든 것이 틀린 것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렇게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기 위한 것이었지요. 죽이라고 하면 그동안 그토록 예수님께서 강조했던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따질 수 있으며, 살리라고 하면 모든 유다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시지요. 돌을 던지라고 했으니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동시에 죄 없는 자는 있을 수 없으니 여자에게 돌을 던질 사람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 마음에 좋은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지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궁지에 몰까만을 생각했었고 이를 위해 모세의 율법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잘못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준을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것이며, 나만 옳다는 기준으로 상대방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옳다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이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죄로 가득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제는 제대로 된 기준을 세우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판단은 저울과 같고 증거는 추와 같다. 그러나 의지가 저울대의 형평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금만 선입견이 가미되면 형평을 잃게 된다(리챠드 위틀리).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우는 것도 은총이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한 달 피정을 했습니다. 이 피정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길로 초대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계속해서 울다보니 창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을 지도해주시는 신부님께 이런 창피함을 고백한 적이 있었지요.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우는 것은 나약함의 표현이기 때문에, 사나이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라고 듣지 않습니까?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이에 대해 아주 간단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는 것도 은총입니다.”

왜 우는 것이 은총일까요? 저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는 것도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이 은총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해주는 역사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1997년 교통사고로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망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해에 영국 내 우울증 환자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글쎄 영국 시민 대다수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이 현상을 두고 ‘다이애나 효과’(Diana Effect)라고 합니다.

우는 것을 통해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게도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는 것도 은총임이 이해되십니까?

기쁨의 눈물도 있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의 눈물 역시 은총일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과 시련의 순간도 은총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총의 길을 무조건 거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기쁘고 또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마음만 있다면 정말로 커다란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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