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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 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19 조회수1,304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6년 3월 17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keep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Jn.8.51)

 

 

제1독서 창세 17,3-9

복음 요한 8,51-59

 

어제는 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었던 곳에서 특강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하는 두 번째 특강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살이 빠지기는 했나 봅니다. 신자들이 하나같이 살이 빠졌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런 제가 안쓰러웠는지 몇 분께서는 먹을 것까지 바리바리 싸 주셔서 차 안에 먹을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당신부로 있을 때 그렇게 잘 지낸 것도 아니었는데 예쁘게 봐주시고, 또 본당을 떠난 지가 한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신경 써주심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본당에 딱 4년 있었는데, 제가 그 기간 동안 본당 신자들을 위해 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미사와 강론에 충실하려고 노력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시니 황송할 뿐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가 받은 것만큼만 주는 것이 세상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많이 준 것 같은데 받은 것이 별로 없다는 불만을 던지면서 상대방과 결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기준을 따르면 분명 저는 드린 것에 비해 더 많이 받았기에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따뜻하게 맞이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더 많은 것을 주시는 것은 왜 일까요?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저를 봐주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이 사랑 때문에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질보다도 사람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사람보다는 물질을, 주님보다는 세상을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영원한 죽음, 지옥의 죽음,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받을 몫인 죽음 등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다인들은 세상의 기준과 물질적인 판단으로 주님의 말씀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십니다. 이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했습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폭력을 휘두르려는 모습 역시 세상의 기준을 따르려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이 아니라,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죽음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떠해야 할까요?

자기만의 기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상과 물질적인 판단으로 주님의 뜻을 가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기준과 판단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매진할 때 우리 앞에 나타난다(앨런 로이 맥기니스).


부활선물도 미리 받았답니다.


고통, 시련, 장애물

한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데 해초가 너무 많아 고기 잡는데 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독한 약을 풀어서 해초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해초는 곧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해초가 없어짐으로 물고기의 먹이가 없어진 것이고, 먹이가 없어지니 물고기도 없어진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어지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이 나를 위한 소중한 도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알을 까고 태어나는 새들은 알 껍질을 깰 때 커다란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하지요.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누군가가 도와주면 태어나서 몇 시간을 못 가서 죽는답니다. 알 껍질을 깨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곁에 고통과 시련의 일들이 또 나를 힘들게 하는 장애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무조건 거부할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때로는 아픈 고통과 힘든 장애물을 주시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들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욱 빛나듯 시련이 있어야 삶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수많은 고통과 시련 그리고 장애물 중에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까요.



이렇게 척박한 곳에 사는 동식물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

 

?그러나 사람들은 이곳을 멋있다고 말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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