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42,1-7)-미카 신부님 글에서~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21 조회수1,309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주간 월요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요한 12,1-11)

 

 

주님의 종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그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셨다.(이사야 42,1-7)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사는 베타니아로 가시어 당신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신다.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을 유다가 비난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장례를 언급하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한다.(요한 12,1-11)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42,1-7)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1)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2)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3)

~~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4)

~~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7)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42,1~9)중에서 이사야서 42장 1절이하 4절까지는  주님께서 소개하시는 주님의 종의 선한 성품과 하시는 일들 제시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1) 

'여기에'에 해당하는 '헨'(hen)'보라'라는 뜻으로서 동사가 아니라 감탄사이다. 당신이 소개하는 종에게 관심과 주의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내가 붙들어 주는 이'에 해당하는 '에트마크'(ethmak)'붙잡다', '지지하다', '떠받히다','지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타마크'(tamak)의 미완료형이다. 미완료형은 미래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그렇게 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동사는 하느님께서 그 권능의 손길로 이 종을 굳게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하시며,보호하시고 높이 세워주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이' 해당하는 '뻬히리'(behiri)의 원형 '뻬히르'(behir)동사 '빠하르' (bahar)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임의적으로가 아니라 어떠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를 신중하게 선택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주님의 종이 구원사업을 능히 수행할 수 있기에 선택하였다는 뉘앙스와 이를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의 능력을 보증하신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함께 있다.

'내 마음에 드는' 해당하는 '라체타'(ratsetha)의 원형 '라차'(ratsa)'기뻐하다', '받아들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제사규정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에서 하느님께서 제물과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레위1,4; 7,18; 19,7; 22,23).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드려진 희생 제사라 할지라도 제물에 흠이 있거나 제사 드리는 자가 율법에 합당한 자가 아니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레위10,1~11; 19,7; 22,23).

그런 점에서 본문의 마음에 든다(기뻐하신다)는 표현은 그가 인류 대속을 위해 드려질 제물로서 조금도 흠이 없다는 사실과 나아가 제사를 드릴 대사제로 완벽한 분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1)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에서 완료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완료시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역사적 완료 본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종 메시야에게 인간으로 육화(강생)하기 전에 천상에서 말씀으로 존재하였을 때 (요한1,1; 필리2,6) 이미 영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음을 나타낸다.

 둘째예언적 완료 본다면, 이 본문은 메시아께서 강생하신 후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사건을 내다보는 예언이 된다.

 

따라서 본문의 완료 시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주님의 종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 즉 하느님의 뜻과 능력으로 구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임을 보여 준다.

'공정'에 해당하는 '미쉬파트'(mishipath)'재판하다'라는 의미의 '샤파트'(shapath)에서 유래하며, '심판', '재판'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정의'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고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인간들 상호간에 평화롭고 올바른 관계가 서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2)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세 개의 부정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이방의 열왕들처럼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크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으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거짓 예언자가 자신을 과시하며 떠들어대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히 그러나 호소력있게 진리를 전달하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마태26,62.63; 27,14; 마르15,5; 루카23,9; 요한8,6; 14,30).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3)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나는 갈대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나일강 주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주요 무대인 팔레스티나의 요르단 강 유역에서도 많이 자라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식물이었으므로, 고대 근동 문학과 성경에서도 상징적, 비유적 표현으로 자주 등장한다. 갈대는 연약하여 바람에 잘 흔들리므로 연약한 인간의 면모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된다(1열왕14,15; 마태11,7).

여기에서 '부러진 갈대'(상한 갈대)에 해당하는 '카네 라추츠' (qaneh ratsuts)는 문자 그대로 반쯤 부러진 상태의 갈대를 나타낸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은 상태와 특별히 죄악으로 인해 영혼이 더러워진 인간의 상태 말한다.

여기에서 '꺾다'는 의미에 해당하는 '이쉬뽀르'(yishibor)의 원형 '샤바르'(shabar)완전히 박살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레위6,21; 1열왕19,11). 사실 상한 갈대는 아무런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에 박살내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다. 

 

이러한 상한 갈대조차 꺾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종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상태 모든 면에서 절망적인 상황, 비관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들을 세상의 왕들처럼 무자비하게 심판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며 새 생명을 주실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일상생활의 필수품인 등불 역시 갈대와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의 문학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꺼져가는 심지' 해당하는 '피쉬타 케하'(pishitah kehah)'희미한 심지'(꺼져가는 등불), '연기나는 심지'라는 의미이다. 

즉 본문의 등불은 기름이 없어서 깜빡이면서 이제 막 꺼져버리려는 순간이나 혹은 꺼져서 연기가 나는 상태의 등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경우 그 등불은 연기가 날 뿐, 등불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러한 상태의 등불은 꺼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등불을 결코 끄지 않으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필요없다고 꺼서 내버릴지라도 주님의 종은 이러한 상태의 등불도 소중히 여기신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그 어떤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자비와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봉사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4)

'섬들'에 해당하는 '이임'(iyim)은 이사야서 40장 15절과 41장 1절, 5절에 사용된 표현으로 '가장 먼 곳'이라는 의미로서 세상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모든 백성들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교훈)에 해당하는 '울레토라토'(uletorato)의 기본형 '토라'(torah)율법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이다. '고대하리라'에 해당하는 '예야헬루'(yeyahelu)의 원형 '야할'(yahal)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기대하다', '기다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러를 앙(仰)''바랄 망(望)'이 합쳐져서 '앙망하다', '우러러 바라보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의 말씀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주님의 종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져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7)

주님의 종의 일은 아시리아나 바빌론 제국의 왕들처럼 수많은 민족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고, 이 땅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세속적인 기업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종의 일은 고통과 괴로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눈먼 자들)에 해당하는 '이우로트'(yiuroth)'이우웨르'(yiuwer)의 복수형으로서 '시각 장애인'이란 기본적 의미에 국한하지 않고,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없는, 지치고  피곤한 자들과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을 말한다(이사56,10). 이것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어떤 생명력도 찾아볼 수 없는 자들, 아무런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나타낸다.

'뜨게하고'(밝히고)에 해당하는 '리프코아흐'(liphqoah)의 원형 '파카흐'(paqah)닫혀 있는 것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을 의미한다(1열왕6,20).  이것은 메시야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 획기적인 일을 통해서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에게 생명과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을 나타낸다.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갇힌 이들' 해당하는 '앗씨르'(assir)'노예', '죄수', '포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독한 자', '가난하고 궁핍한 자', 죽이기로 정해진 자'라는 표현과 병행하여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실제적인 노예와 죄수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매우 극심한 고난과 고통을 받고 있는 자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에서 격리되어 죄와 죽음의 법칙에서 얽매어 어둠의 권세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들의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감옥에서'에 해당하는 '밈마쓰케르'(mimmasger)의 원형 '마스케르'(masger)'지하감옥'이라는 의미로서 빛이 들어오지도 않고 눅눅하고 침침한 토굴을 지칭하며, 이곳에서는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그야말로 완전한 절망적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 준다. 사실 하느님을 떠한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할 수 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어둠'에 해당하는 '호셰크'(hoshek)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을 의미하며(창세1,4; 탈출10,21), 비유적으로는 큰 슬픔이나 불행을 당하거나 파멸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2사무22,29; 욥17,23).

즉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란, '눈먼 이들'이나 '감옥에 갇힌 자들'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 볼 때, 아무런 소망없이 고통과 절망 가운데 처한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특별히 여기서 사용된 '앉아 있는 이들' 해당하는 '요셰베'(yoshebe)원형 '야샤브'(yashab)'거주하다', '머무르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잠깐이 아닌 계속 이러한 상태에 있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에 갇힌 죄인이 혼자 힘으로 그 곳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의 활동으로 여기에서 능히 벗어나게 될 것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미카 신부님 글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