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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 죽음에 이어지는 부활 / 주님 수난 성금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25 조회수1,083 추천수0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의 수난기는 유다인들이 군사들을 앞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놀랍게도 그들의 인도자는 유다였다. 스승님의 예언처럼 그는 배반자가 된 것이다. 화가 난 베드로는 대사제의 종을 칼로 내리친다. 스승님께서는 즉각 제지한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ㄴ)?” 십자가 길은 이렇듯 예수님의 ‘철저한 순명’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무기력함을 본다. 신적인 권능 발휘로 고통을 벗는 극적인 사건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은 무능해 보일지언정 비굴한 모습은 아니다. 참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하느님 손에 맡기신다. 이처럼 겉으로는 ‘미약한 이’로 보이지만 어떤 이에게도 볼 수 없는 ‘굳건한 믿음’을 지니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면을 볼 수 있는 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게다. 믿지 않은 이에게는 십자가 죽음이 어리석지만, 구원 받을 이에게는 그게 되레 큰 힘이 된단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 길을 걸으셨다. 이렇게 짧은 하루 동안 그분께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죽음이라는 끔찍한 일을 당하신다. 그럴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순전히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러기에 받아들이신 게다. 빌라도나 군중 앞에서나 그분은 일체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정녕 억울한 일이었건만 입을 꼭 다무셨다. 다른 이에게는 많은 말을 하게 하시고는 정작 당신은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않으셨다.

 

우리 역시 많은 ‘억울함’을 체험할 게다. 수없는 ‘불공평’도 만나리라. 운이 나빠 그랬던 것이 아닌데도. 일진이 안 좋아 생겼던 것도 아닌데. 이제는 그런 마음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속에 담긴 주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 예수님은 우리 죗값을 홀로 치르실 이유는 없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철저히 당신자신이 택한 자유였다. 인류 구원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기에 오늘은 ‘감사의 날’이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 그분 결단에 진정 ‘감사를 드리는 날’이다.

 

그런 생활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예수님 죽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리라. 고마운 일을 감사하기는 쉽다. 누구나가 한다. 하지만 고맙지 않은 일을 감사로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실천에 옮긴다면 삶은 분명 변화될 게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한다. 그 ‘잠시’에 수많은 생각이 스친다. 그분 사랑, 우리 죄, 세상의 고통이 심장을 두드린다. 십자가 경배 때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분께서 바로 우리의 죄로,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셨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눈물과 함께 깨닫는다. 이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시신이 내려지고 무덤에 안장된다. 눈물과 감사가 함께 우리 마음을 채운다. 당신 무덤 앞에서 번민하는 우리에게 포근한 당신 사랑에 슬픈 아쉬움과 흐느낌에 가슴이 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5)” 그렇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한 인간의 무능과 어리석음만을 바라보는 이방인들과는 달리 믿는 그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할 게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들에게 허락하신 하느님의 참된 지혜의 선물일 것이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며 그분이 가신 그 길을 조용히 걸어보자. 금식과 금육의 ‘나만의 고통’을 한번 확실히 체험하면서.

 

오랜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은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 거행한다. 본래는 말씀 전례만 있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도입되어 오늘의 전례로 고정되었다. 전례 개혁 전에는 집전 사제만 성체를 모셨으나, 1955년 이후로는 모든 교우에게 영성체가 허용된다. 사제가 입는 홍색 제의는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리를 상징한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고 통회한다. ‘금식과 함께 금육’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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