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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치기신부님의 말씀묵상]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6-04-02 조회수3,076 추천수9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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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어온 순환 주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서 되풀이되어온 사랑과 배신의 역사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인간 측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목숨처럼 충실히 지키겠다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떠나갑니다. 떠나가는 당신 양떼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운 하느님께서 제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완고한 백성들은 귀를 틀어막고 제 갈 길을 가버립니다.

 

 

아무리 진노와 징벌에 더딘 하느님이시라지만 견디다 못해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그제야 잘못을 깨달은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의 부르짖음, 그것을 또 못견뎌하십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모아들이듯이 당신 양떼를 다시 한 번 당신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또 다시 백성들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사랑과 배신의 역사, 용서와 화해의 역사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랑과 배신의 역사가 오늘 우리들의 신앙 여정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경을 토대로 살펴볼 때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가 인간 측의 불신(不信)과 완고함입니다. 불신은 다른 말로 바꾸면 우상숭배와 불충실입니다. 인간의 완고함은 또 얼마나 하느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완고함이 얼마나 견디기 힘겨우셨으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키엘서 36장 26절)

 

 

부활하신 예수님 역시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 앞에 혀를 내두르십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던지 제자들을 꾸짖기 까지 하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코복음 15장 14절)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 몇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반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복음 9장 22절)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혹시 몇몇 제자들은 대충 감을 잡았을지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수용하기도 힘든 말씀이기도 했지만 우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 부활 현장을 직접 목격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역시 예수님 부활을 불신했습니다. 불신의 바탕에는 돌처럼 완고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줄기차게 따라다녔지만 영혼 없이 허깨비처럼 몸만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활이 그저 머나먼 옛날 한 청년의 부활로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번 부활이 물설고 낯선 땅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오늘 이 자리,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부활로 연결되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향한 불신과 의혹의 시선에서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건너올 수 있는 은총을 계속해서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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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어온 순환 주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서 되풀이되어온 사랑과 배신의 역사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인간 측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목숨처럼 충실히 지키겠다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떠나갑니다. 떠나가는 당신 양떼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운 하느님께서 제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완고한 백성들은 귀를 틀어막고 제 갈 길을 가버립니다.

 

 

아무리 진노와 징벌에 더딘 하느님이시라지만 견디다 못해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그제야 잘못을 깨달은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의 부르짖음, 그것을 또 못견뎌하십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모아들이듯이 당신 양떼를 다시 한 번 당신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또 다시 백성들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사랑과 배신의 역사, 용서와 화해의 역사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랑과 배신의 역사가 오늘 우리들의 신앙 여정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경을 토대로 살펴볼 때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가 인간 측의 불신(不信)과 완고함입니다. 불신은 다른 말로 바꾸면 우상숭배와 불충실입니다. 인간의 완고함은 또 얼마나 하느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완고함이 얼마나 견디기 힘겨우셨으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키엘서 36장 26절)

 

 

부활하신 예수님 역시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 앞에 혀를 내두르십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던지 제자들을 꾸짖기 까지 하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코복음 15장 14절)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 몇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반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복음 9장 22절)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혹시 몇몇 제자들은 대충 감을 잡았을지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수용하기도 힘든 말씀이기도 했지만 우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 부활 현장을 직접 목격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역시 예수님 부활을 불신했습니다. 불신의 바탕에는 돌처럼 완고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줄기차게 따라다녔지만 영혼 없이 허깨비처럼 몸만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활이 그저 머나먼 옛날 한 청년의 부활로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번 부활이 물설고 낯선 땅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오늘 이 자리,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부활로 연결되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향한 불신과 의혹의 시선에서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건너올 수 있는 은총을 계속해서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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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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