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실질적인 문제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4-03 조회수1,047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실질적인 문제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도피하는 영성,

즉 핵 시대의 문제와 책임 가운데

인류가 불가피하게 연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심을 갖기를 거부하는

또 다른 종류의 세속 숭배에

심각하게 헌신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성화에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무관심과 무감각함을

'침잠'이라고 속여서도 안 되고

비겁하게 후퇴하는 것을

희생이나 예배의 행위라고

변명해서도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수동성(passivity)

'신앙'이나 '초월'

간주해서는 안 된다.

절망적인 운명에 놓인

인간에 대한 관심부족은

비난받아 마땅한 무감각이며

통탄할 만큼 사랑에

무능력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 보든지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

그것은 또한 순수하게

인간적이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자기 태도를 분명히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교회가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나

리더십을 발휘하기 전에는

필연적으로 뚜렷하지 못한

일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전세계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의

중대한 주제,

예를 들어 세계 평화와 같은

주재들에 대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적절한 지침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에는 실질적인

사회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양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위험을 져야 한다.

교황청으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전체 교회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자신은 행동하지 않겠다는

타성이나 의기소침하고

소극적인 '신중함'

덕이 될 수 없다.

교황 요한 23세는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은

회의주의나 후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명백하게 천명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세속적인

문제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분노케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마주해야 한다.

교황 23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의 자녀들,

특히 평신도들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그리스도교적 헌신을

새롭게 하고 크게 하는 대신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잘못 된 일이다."

물론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갖는 의무들은

온전하게 유지된다.

정치, 경제, 경영과

산업분야는 신부나

종교인들이 아닌

평신도들의 분야다.

현 시대의 사건들을 다루는

예수회 신부의 방식은

가르멜 수녀의 방식보다

더 진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의무로 깨달아야 한다고 해서

우리 본연의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하고 정치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종교인들도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야 하고

대다수 인류가 겪는

가난의 문제,사회적 혼란의 위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면적인 핵 전쟁의 위협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성찰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병약함의 증세로서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너무나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없다.

평신도 사제 그리고 수도자들은

자신의 신원에 따라

나름의 방법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하느님께 바치고

'세상을 포기한' 사제나

수도자들은 특별한

영성적 과제에 헌신하고 있다.

그들은 사무직, 군복무,

의사, 법조계 등

전문적인 직업들을

포기해 왔고 그래야만 했다.

포기의 목적은 자신만이

수행할 수 있는 다급한

영적 사명을 위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경우 세속적인 사건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수도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들을

어려움과 혼란으로 오는

주요 원인은 지난 수세기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신분과 본분 사이의

이론적인 경계가 현실에서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들,

수도자와 수도원장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책무를 맡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권리와 세속적인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인 행동까지

감행했었다.

성직자나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교육을 받을 수 없던 시절,

그들이 실질적으로

모든 직종에서 일했던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직자들은

정부 쪽에서도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다.

평신도들에게 맡겨졌던

일들을 서서히

성직자들이 맡아 가는 과정은

역사 속에서 흔히 발견되었다.

비록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성직자들이 실제로 정부,

경영, 법조계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교회 내에서는 여전히

수세기 전의 상황이

계속 되고 있다.

교회내의 물질적인

문제들이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당연시되고 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여러 가지 직무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다수는 경영을 비롯하여

순전히 세속적인 문제들에

관계하고 있다.

그런 직무들은

생각하건대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평신도들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활동 수녀회의

성소자들이 감소되고 있는

문제를 생각할 때,

젊은이들이 자신의

성소 문제에 대해

갈등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신도들이

하는 일에 추가하여

수도자들의

의무와 규율을

지켜야 하는 상황 아래서,

결국 양쪽 모두의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될까 봐

갈등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두 가지 삶의

어려움과 짐을 모두 지되

수도자로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면

그런 헌신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도자들이 세속적인

업무를 떠맡게 되면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결과는

그들이 세속적인 위안에

대한 '권리'같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이것이

문제가 되는 한 가지

통로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한 것인가?

기분전환을 대체할

그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은 공동체의 공식적인

'수도 일과'뿐 아니라

수도자 개개인이

자신의 일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야 할 영성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여가까지

명백하게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든,

그리고 사실 그 문제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많은 주장들이

실제로 있지만,

수도자들이 습관적으로 

세속적인 직무에

깊게 관여하면 할수록

수도자로서의 삶이

위축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수도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일을 영적인

활동으로 간주하라고

충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그들이 맡은 일이

수도회의 회칙과 규약

그리고 교회가 그들에게

미리 설정한 한계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그들을 성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성격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수도자 본연의

임무 외에 평신도들이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떠맡을 경우,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수많은 세속적인 활동들이

그들의 소명과 영성에

부합되는지 진지하게 고찰하고

조정할 것이 요구된다.

이 조정은 개별 수도자들의

선한 의지만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것은 선의나 개인적인

신실함이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혁의 문제인 것이다.

평신도들은 수도자들이

현재 맡고 있는

교육, 경영, 간호, 언론,

사도직, 전교 등

여러 가지 활동들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평신도들이 이러한 책무들을

맡아 함으로써

수도자들이 좀더 집중적이고

결실을 볼 수 있는 직무에

투신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요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평신도나 수도자, 사제들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상가들이라도 투표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이상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 상황에 관한

진지하고 객관적인 정보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제공하는 것보다는

지혜롭고 광범위한

식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정치적·사회적

사건에 관해 믿을 만하고

진지한 정보 및 건전한

견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핵 전쟁과 잇따른

정치 문제들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것들이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들로

이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실들이 은폐되고 있으며

중요한 개발들 역시

대중들에게 명확하게

편견 없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더 중대한

분제를 제기한다.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신문이나

텔레비전, 라디오 등

언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리고 정치적으로

광신적인 집단에 기질상

쉽게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와 교회와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다는 순수한 의도를 갖고

엄청난 어리석음과

불의에 협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경향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때까지

특정 목적을 향한

자신의 열의를 조절하고

정열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신중함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조심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격렬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그 자체로 영웅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 모두 교회의 현명한 지침,

특히 교황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삶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적 거룩함의 문제

그리고 구원 자체에 관한

기본적인 물음과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제, 거룩함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가자.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는

초월, 희생, 그리고

일반적인 자기 부정이

성화의 근본이라고

여겨져 왔다.

평신도들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자신들도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고행과 편태를 해야 한다고

오해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수도자와 평신도 사이의

경계선에서 야기된 혼란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의 금욕은 똑같은

지향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금욕의 목적은 마음과

의지를 자유롭게 하여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각자의 본분에 걸맞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삶과 거룩함에서

Thomas Merton 지음

남재희 신부 옮김

- 생활성서 펴냄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