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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 † 성령을 받아라! (요한20,19-31;사도2,1-11)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4-08 조회수97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43/주일복음말씀묵상/ (1) 성령을 받아라! (요한20,19-31; 사도2,1-11)

 

 

오늘 독서 내용은 사실 너무나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믿는 이들이 이를 잘 모르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는 두 방면이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역사의 두 방면에 관하여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성령에 관한 진리를 합당하게 알 수 없다. 하느님은 세 위격(person)의 한분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세분의 하느님들이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한분의 하느님께서 세 위격, 곧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표현이시며, 성령은 교통 곧 신성한 전달이다. 성령은 아버지의 어떠하심과 하느님 아들이 표현하시는 바를 전달하고 교통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세 단계의 물로서 예시할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근원 곧 원천에의 물이고, 두 번째 단계는 샘의 물이다. 물은 근원인 원천에서 나오고, 샘은 그 물을 담는다.

 

세 번째 단계는 흐름, 곧 그 물을 흘려내고, 그 물을 모든 것으로 가져가며, 그 물로서 다른 곳들에 이르게 하는 흐름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물들이 아니라 세 단계에 있는 물, 곧 원천의 물, 샘의 물, 흐름의 물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근원이시다.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들은 신성한 우물 곧 신성한 샘이시다. 성령은 우리에게 도달하는 신성한 흐름이다!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께서는 바로 성령으로서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있다! 그분 자신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없다. 심지어 하느님 아들 안에서 표현되실 때조차도 그분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없다! 아들 안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영으로서, 그 영, 곧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다! 그러므로 신성한 경륜, 곧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안에서 성령은 하느님께서 흘러나오셔서 우리를 방문하시는 그 세 번째 단계 곧 마지막 단계이시다.

 

요한7,37-39절은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말씀 안에 우리가 기억해야할 두 가지 중점들이 있다. 먼저 제자들이 영접하려고 하는 성령은 곧 그들 안에 계실 것이고, 또 그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실 것이다. 성령은 여기서 마실 수 있는 물로 비유된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주께 나아와 이 생수, 곧 성령을 마실 수 있다!

또한 요한14,17절에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은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성령이 마실 수 있는 생수이고, 그는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성령의 한 방면이다.

 

그런데, 루카24,49절은 성령의 또 다른 방면을 보여준다.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아버지의 약속은 성령이다. “높은 곳(위에)(upon)”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그것은 안에(in)”와는 다르다. 이 구절에서 성령은 우리 안으로(into)가 아니라 우리 위에 임한다.

 

능력을 입는 것은 능력으로 옷 입는 것이다. 위의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마실 수 있는 생수에 비유되지만, 루카복음에서 성령은 우리의 입는 옷에 비유된다. 물과 옷은 서로 다르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그것은 우리 속에 있고, 우리가 옷을 입을 때 그것은 우리 위에 있다. 옷처럼 우리를 입히는 성령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고, 반면에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마시는 물처럼 생명을 위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을 우리 속에 생명으로서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을 우리 위에 임한 영으로서 가지고 있다. 우리 속에 생명으로서 계신 성령은 마실 수 있는 물로 비유되고, 우리 위에 임한 성령은 옷으로 비유된다. 2열왕2,9-15에서 엘리야가 하늘 속으로 들려 올라갔을 때, 그는 겉옷을 엘리사에게 넘겨주었다. 엘리사는 바로 그런 식으로 엘리야가 가졌던 능력을 받았다.

 

그 겉옷은 엘리야가 위로부터 능력을 옷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2,2-4절에서 주님은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하셨고, 그분의 영을 하늘로부터 옷처럼 내려 보내셨다. 이제 우리는 이 능력으로써 옷 입었다.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가 마시는 물로서 우리 속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의 겉옷으로서 우리 위에 임하고 있다. 이것들은 성령의 역사의 서로 다른 두 방면이다.

 

사도2,1절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라고 말한다. 오순절이란 단어는 오십 일째 되는 날을 의미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유월절(요한19,14) 후 둘째 날(그 주의 첫째 날, 루카23,54-24,1),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부터 계산할 때 칠 주가 되는 오십 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것은 맥추절(탈출23,16)이라 불리는 칠칠절(신명16,10)의 성취였고,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린 날부터 일곱째 안식일의 다음날까지를 계산한 것이다(레위23,10-11, 15-16). 첫 이삭 한 단을 드린 것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요한20,17) 곧 안식일 이튼 날에(요한20,1) 하느님께 드려진 부활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 날부터 오순절 날까지가 꼭 오십 일이었다.

 

오순절은 수확물 가운데 한 단의 첫 열매를 드린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이었다. 수확 가운데 한 단의 첫 열매에 관하여 레위기 23,10-11절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튼 날에 흔들 것이며라고 말한다.

 

레위기 23장에 따르면, 수확 가운데 첫 열매 한 단은 안식일 다음날 요제로서 주님께 드려졌다. 그 첫 열매 한 단은 부활 가운데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1코린15,20,23)!구약에서 수확물이 익었을 때, 그 수확물 가운데 첫 열매 한 단은 하느님께 드려졌다. 이 한 단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 하느님께 드려졌던 부활한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부활 안에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드림은 그분이 아버지께 은밀히 승천하신 것을 암시한다! 요한20,17절에서 마리아가 그분을 만지려고 했을 때, 그분은 그녀에게 나를 만지니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느님 곧 너희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분을 만지려고 했을 때, 그분이 만지지 않기를 원하셨던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의 누림을 위해 부활의 신선함 가운데서 그분 자신을 드리려고 아버지께 가시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날 당일에 주님은 은밀히 하늘로 가셨다가 저녁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신 후에 그분은 그분 자신을 그들 속에 생명주는 영(1코린15,45)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한20,22절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그들 안으로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연기(演技)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탈출23,19절에서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나의 하느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라고 말한다. 첫 열매로서 그리스도는 새롭고 신선하시다.

 

부활하신 날 아침에 그분은 아버지께 직접 가서 그분 자신을 첫 열매로 아버지께 드리실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마리아 때문에 지체하셨는데, 마리아는 그분을 부활 안에서의 곡식 한 단으로 누렸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당일에 수확물 중 첫 열매의 예표가 성취되었다! 그런 다음 오십 일 후 오순절 날에는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물의 수확을 누리는 누림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부어진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의 구속된 사람들에게 완전한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 영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좋은 땅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오순절 날에 넘치는 성령을 받은 것은 비단 그들이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과 승천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분깃인 그리스도의 넘치는 풍성에 참여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은밀한 방면과 공개적인 방면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밀한 승천은 부활하신 날의 아침에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공개적인 승천은 그로부터 40일 후에 발생하였는데, 그때에 그분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감람산으로부터 승천하셨다. 그리스도의 은밀한 승천은 그분 자신을 부활 안에서의 첫 열매로 아버지께 드리기 위함이었다.

 

같은 날 그분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그분 자신을 그들 속으로 불어 넣으셨다. 이럼으로서 제자들은 수확물 가운데 한 단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누림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첫 열매로 누린 후에 제자들은 더 나아가 오순절 날 그분을 수확물로 누렸다. 내적인 생명으로 성령을 누리는 것은 첫 열매 한 단으로서의 누림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인 능력으로 누리는 것은 드러나게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수확물로 누리는 것이다. 필리1,19절에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수확물 가운데 첫 열매로 받는 공급은 신선하지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순절 날 풍성한 수확물을 갖게 될 때라야 비로소 넘치는 공급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 두 방면의 성령을 모두 체험해야만 한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영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날 수확물의 풍성한 위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체험해야만 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다! 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축복이다! 알렐루야! 아멘.

 

<(2) “성령을 받아라!”를 이어서 연재하오니 참고하기시를!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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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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