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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당신은 은총 안에 서야 한다!! (로마5,1-8)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5-21 조회수2,31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522일/주일복음말씀묵상/ 당신은 은총 안에 서야 한다!! (로마5,1-8)

  

 

5,1-8절은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의롭게 된 결과 그리스도인이 현재 누리는 복, 곧 하느님과의 평화과 미래의 소망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바오로는 로마서 1-4장의 결론을 내리면서 새로운 주제로 이동해 간다.

 

로마5,1절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라고 말한다. 죄인은 단순히 연약한 자가 아니고 하느님께 반역한 자로서, 하느님의 원수이고(5,10) 진노의 대상이다(1,18; 2,5).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느님과 평화를 누린다. 믿는 자는 더 이상 하느님에게서 분리되지도,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3,8이하).

 

5,2절은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은총의 영역, 곧 하느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복을 마음껏 향유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 곧 미래에 하느님의 생명(불멸의 생명)과 통치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면서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렇다! 은총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다. 당신은 은총 안에 서야 한다. 당신은 은총의 자리 밖에 있음을 느낄 때마다 즉시 되돌아와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내와 다투려고 하는 순간, 은총의 자리 밖에 있음을 느낀다면, 즉시 다투려던 것을 멈추고 은총의 자리에 돌아와 거기에 서야 한다! 곧 당신의 영 안으로 즉시 돌이켜, 당신 영 안에 계시는 성령을 주목함으로써 그분은 당신을 은총의 자리에 되돌아오게 하신다!

 

만일 당신이 언제나 당신의 타고난 성질로 실패하고 있다면, 이제 당신의 영으로 돌이킴으로서 그분의 능력을 체험해 보라! 우리는 죄를 지어 은총과 끊어져서는 안 된다. 은총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느낄 때 주님, 나를 용서하옵소서. 나를 은총의 자리로 데려가 주소서라고 기도해 보라! 당신은 즉시 은총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은총의 자리에 들어갔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자백하고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향하여 평화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믿음으로 인한 칭의(稱義)는 문을 여는 것이며, 우리에게 들어감을 허락하는 것이요, 누림의 넓은 초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칭의의 문을 통과한 후 우리는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죄인에게는 평화가 없다. 로마3,17절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평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은총은 우리가 얻고 설 곳이며, 평화는 우리가 걸을 길이다. 은총 안에 서고, 평화 안에 걸어라!

 

그런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 어려움도 없이 날마다 춤추며 노래하면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적대적인 세상에게 받는 고난이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세상의 환난이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고 경고한다(사도14,22).

 

3-5절은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연단), 수양(연단)은 희망(소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로마8,28-29절은 하느님께서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환난과 고난은 우리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화와 은총과 영광을 누리기는 좋아하지만 환난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난은 바로 은총의 방문이다! 마찬가지로 환난을 거절하는 것은 은총, 곧 우리가 체험하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

 

이 은총은 주로 환난이라는 형태로 우리를 방문하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긴다.” 바오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먼저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 우리가 환난을 만나면, 곧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사면초과의 환경을 만나면, 그 때 자기의 무력함과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며, 마침내 겸손히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바로 이때가 주님을 주관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은총의 때이다!

그 다음에 인내는 연단(鍊鍛, approval)을 낳는다. 가톨릭 성경에서 수양이라고 번역한 부분은 원문상 연단이나 훈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연단이란 원금속이 불에 완전히 정련되어서 귀금속으로 남는 것같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여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련의 불 속에서 하느님이 인정하시고 보존하시는 믿음을 갖는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내하는 자는 나중에 반드시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하느님의 돕는 손길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제련되진 않은 금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광택을 내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태우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생명과 빛이 있다. 이런 것들이 있으므로 주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그들은 쉽게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연단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지만, 제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성분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위로하거나, 포용하는 덕성이 결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연단은 희망을 낳는다. 여기서도 희망보다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비슷한 의미일지라도 더 감미롭고 가슴에 와 닫는다!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강하게 체험한 자는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미래의 영광을 대망하게 된다(5,3-4). 이러한 과정은 모두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 소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리라는 소망이다. 우리는 은총 안에 서 있고 평화의 길을 가지만 아직 영광에는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영광에 들어갈 그 날이 올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은 천박한 욕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이 세상에 파묻혀 소망 없이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바라보며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예비된 미래의 영광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이란 하느님 자신의 나타남이다! 하느님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영광이다! 마치 그것은 전구 속에 전류가 나타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전기의 표현은 전기의 영광이다. 우리는 전기 자체는 볼 수 없다. 전기가 전구 속에서 불빛으로 빛을 발할 때, 그것이 곧 전기의 표현이요 전기의 영광이다. 이처럼 영광이란 표현된 하느님이다! 이 영광은 올 것이며 그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다가올 이 영광의 소망 안에서 하느님을 누린다! 우리는 그분을 누리면서 앞으로 올 영광을 바라며 소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것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소망의 궁극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5,5-8절은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들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소망은 일상의 현실 속에서도 역시 그 진실함이 확증된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소망의 신빙성에 대한 담보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 된다(5). 로마5,5-8절에 의하면, 그 근거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곧 우리가 스스로 구제 불능일 때에 그리스도는 경건치 못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6). 이것은 인간의 사랑을 초월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확실성은 주관적인 느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불경건한 자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죽는 일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하게 죽는 경우는 가끔 있다. 그런데 악인을 위하여 죽는 것은 아예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인된 우리가 원수처럼 하느님을 대적할 때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셨다.

인간의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은 이해할 수도 없고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원수들에게 불타는 진노의 심판을 퍼부어야 할 때, 오히려 원수들을 위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의 위대함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신하며 마음 깊이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5,5).” 여기서 부어졌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으로(요엘2,28: 즈카12,10), “무한한 충만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그 사랑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것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도, 인간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 사랑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심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소망의 확실한 근거이다.

 

로마서 511절은 로마서의 큰 분기점이다. 이 부분은 성경의 맥을 이해하는 급소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믿는 이들에게 이 부분의 진리가 감추어져 왔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로마5,9-21까지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이라는 주제로 계속하여 다루고자 한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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