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6.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15 조회수1,532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6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독서 2열왕 2,1.6-14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걷다가 예리코에 도착하자,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요르단 강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7 예언자들의 무리 가운데

쉰 명이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요르단 강 가에

 멈추어 서자, 그들도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섰다.
8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9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13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섰다.

 14 그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넜다.

복음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

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신학생 때 제가 다니던

본당에는 아주 괴팍한

형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본당에서 봉사활동은

아주 열심히 하셨지만,

 별 것도 아닌 것에도 화를

얼마나 내시던지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 앞을 피하곤 했었지요.

한 번은 본당 바자회 때에

한 청년이 서빙을 하다가

이 형제님과 부딪혀서

음식을 쏟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공손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님께서는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혼을 내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제가 갑곶성지에 있을 때

이 형제님을

여기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워낙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오셨었기 때문에

성지 안이 상당히 복잡했었지요.

이렇게 복잡하다보니 커피를

 나르다가 어떤 형제님과

부딪혔는데 바로 문제의

 형제님이신 것입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화를 내셨을까요?

 안 내셨을까요?

자그마한 부딪힘에도

화를 내시던 형제님이신데,

커피 물을 쏟은 제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는 곧바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깊은

사과를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신부인 저인 것을 확인하시고는

화내기보다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신부님.

 커피 묻은 옷은 빨면 되니까

아무런 문제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화를 내시지 않았을까요?

그 동안 성격이

바뀐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자신에게 불편함을

준 사람이 ‘신부’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에게는 차마 평소의

모습을 보이면서 화를 내기

힘들었던 것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숨을 받아

창조된 것을 떠올린다면,

각자의 모습 안에는 하느님의

속성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바로 또 다른 하느님께

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감히 미워할 수도,

판단할 수도,

 또 단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도 아닌,

 내 구원의 결정적 열쇠를

맡고 계시는 주님께 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선을 행하는 것은

분명히 옳습니다.

그런데 자선을 할 때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고 하시지요.

 즉, 인간의 찬사를 추구하면

사람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보상만을 받을 뿐인 것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자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에서

리는 감추어져야 하고,

대신 하느님께서

드러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실 수 있도록 생활한다면

나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 모습보다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나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의 구원은

 더욱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내 꿈이 아무리 커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마법은 작은 걸음 속에 숨어 있다.

(김택진)

꽃의 향기가 너무 좋아요.

이 나무가 무슨 나무에요?

주님과 친해지기

지금 인천교구 사제들은

강화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연수중입니다.

사목활동에 도움이 되는

강의를 들으면서 동시에

오랜만에 반가운 신부님들을

  만나면서

좋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체험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윗옷을

바지 속에 넣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좀 나오다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은 몸매(?)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윗옷을

 바지 밖으로 빼놓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 윗옷이

기능성 옷이라 몸에

달라붙어서 몸매를 더욱 더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글쎄 이 상황을 가지고서

 10분 이상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상황,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서로 친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저와 친한 동창 신부와의

관계를 떠올립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는데

참 길게 통화하는데,

아무리 못해도 30분

이상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바로 친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도

화제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기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지요.

그런데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맞습니다. 아직 하느님과

친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쉽게 주님께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멋진 하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