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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6.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18 조회수1,22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독서 2역대 24,17-25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복음 마태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

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소크라테스는

 “결혼하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하지 않는 편이

좋은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어느 편이나

 다 후회할 것이라고

대답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모두

후회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또 반대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을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우선 취업이 힘들어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가

 쉽지 않답니다.

이런 상태에서 결혼을

하는 데는 너무나 큰 걸림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비용도 만만치 않고,

결혼 후에는 자녀 양육과

교육에 대한 걱정을 하다 보니

결혼을 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런 식으로

걱정을 하다보면 걱정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한 산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수명이 400년이나

 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총 14번의 벼락을 맞았고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냈었습니다.

그런데 400년 만에

쓰러진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딱정벌레 떼가 나무속을

파먹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자연의

거센 흐름도 이겨냈던

고목이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죽일 수 있는

 작은 벌레들에 의해

쓰러진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내 삶의 큰 고통과 시련은

 이겨내면서도 ‘걱정’이라는

 작은 생각들로,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해서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요?
잘 생각해보면 결혼이 꼭

걱정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

그래서 의지할 수 있고 더욱 더

성숙한 삶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를 닮은 자녀까지

갖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이 많습니까?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것

투성인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걱정을

 어떻게 맞설 것인가가 아닐까요?

집착하지도 또 욕심내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걱정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걱정으로 힘을 쏟기보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그래야 다른 모든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내 앞을 찾아오는 수많은 걱정들,

그 걱정을 어떻게 맞서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

걱정하기 보다는 지금을 더욱 더

충실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그러나 어려움은 잠깐일 뿐이다.

인생에는 ‘그럼에도’라는

반전이 도사리므로.

(김수림)

예수님의 수난을 보았을 게세마니의 올리브 나무.

냄새를 맡다.

올해 들어서

잔병치레가 많았습니다.

특히 입과 코 안이 헐어서

 많은 시간을 힘들어 했었지요.

미사나 특강을 통해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더욱 더

어려워지더군요.

그러한 제 모습을 본

동창신부가

코 안이 헐었을 때에는

 상처 났을 때 바르는 연고를

바르면 바로 괜찮다면서

직접 발라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정말로

괜찮아졌습니다.
그 뒤 저는

 코 안이 헐기만 하면

이 연고를 발랐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이상한 것입니다.

글쎄 냄새를 하나도

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화장실에 갔을 때에도,

집안을 청소할 때에도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5일 정도

먹으니 희미하게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느낌이었고,

일주일을 먹으니 드디어

선명하게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냄새가 맡을 수

있다 보니 일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입고 있는 옷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발견해서

빨래를 자주 해야 합니다.

집안에서도 홀아비 냄새가 나서

청소를 하게 됩니다.

제가 키우는 개한테도

냄새가 나서 힘들어도

 목욕을 시킵니다.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할 일이 많아졌다고 해서

다시 냄새를 맡을 수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지요.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여러 능력과 재능도

그렇지 않을까요?

일이 많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받은 만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불평불만보다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기쁨의

시간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숲을 가도

싱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ㅋㅋ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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