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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 미사 강론]"병자와 장애인의 희년 미사 강론" (2016년 6월 12일 주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18 조회수1,041 추천수0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news.va/en/sites/reflections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cotidie/2015/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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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6612일 주일 [연중 제11주일]

[강론 당일 매일 미사 말씀] 1독서 : 사무엘기 하권 12,7ㄱㄷ-10.13

화답송 : 시편 시편 32(31),1-2.5.7.11(◎ 5ㄹ 참조)

2독서 :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2,16.19-21

복음 : 루카 복음 7,36―8,3<또는 7,36-50

http://info.catholic.or.kr/missa/?missaid=7375&gomonth=2016-06-12&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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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의 병자와 장애인의 희년 미사 강론

http://www.news.va/en/news/pope-francis-homily-for-jubilee-of-the-sick-and-di

 

2016-06-12 바티칸 라디오 (Vatican Radio)

 

 (바티칸 라디오프란치스코 교황은 완벽한 몸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완벽한 몸을 추구하는 것은 소수 특권자들이라고 교황이 묘사한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장애인들을 뒤로 숨기는 사회로 이어 진다고 말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에서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위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교황은 완벽한 외모가 거대 사업과 함께 강박증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서로 포용하고 연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다음은 교황 성하 미사의 준비된 강론 전문이니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서 2,19). 이 말씀 안에서 바오로 사도는 강력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에서 받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의 역독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물에 잠김으로써 이를테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힙니다.(로마서 6,3-4) 그리고 이 하나됨이 성령 안의 새로운 삶이 앞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남은 우리 삶의 모든 면을 포용합니다. 병과 고통과 죽음 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탁되고 그분 안에서 그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합니다. 오늘 병자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바치는 이 희년의 날에 생명의 이 말씀은 우리의 모임 안에서 특별한 울림을 갖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이든 또는 다른 이들이든 곧 머지 않아 - 때때로 고통스럽게- 노쇠함과 질병에 직면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너무나 극적인 인간적인 경험들은 얼마나 다른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 모두는 직접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다급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용히 냉소주의에 굴복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오로지 해결책은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지해서 그저 이 경험들을 견뎌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완전히 과학에 신뢰를 둘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약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몇 안 되는 극히 적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죄로 상처 입은 인간의 본성은 한계로 얼룩져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에 우리는 심각한 육체적인 한계들로 특징 지워지는 삶에 제기되는 이의들에 익숙합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쾌락과 오락 문화로 지탱되는 라이프 스타일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 강박증과 거대 사업이 되어 버린 시대에 불완전한 것은 뒤로 감춰져야 합니다. 그것이 몇 안 되는 소수의 특권자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협하고 우월한 모델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 부자조차도 ? 가장 멀리, 어떤 울타리안이나 경건주의나 사회복지의 안으로 떼어 버려져야 합니다. 그들이 잘못된 웰빙의 속도를 늦추지 못하게 하려고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는 그들이 위기의 시대에 수용할 수 없는 경제적인 짐이 되니까 가능하면 제거하는 더 좋다는 말을 들을 때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병과 장애에 직면하여 자신의 눈을 감을 때 그 환상이란!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고통과 한계를 받아 들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외모가 완벽한” ? 나는 잘못된이라고 하기 보다는 완벽한이라고 말합니다만- 사람들만이 그곳에 살고 있있기만 하면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대와 서로 포용하고 존중함이 늘어날 때 더 나은 세상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얼마나 진실합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코린토 1 1:27)!

 

이번 주일의 복음(루카복음 7,36-8,3)은 우리에게 약함의 특별한 정황을 보여 줍니다. 죄인인 여자가 심판 받고 거부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받아들여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이 여자는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그 여인의 고통과 간청에 주의를 기울이신 예수님의 결론이십니다. 이 다정하심이 고통 받고 내쳐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고통 받는 결핍은 단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가장 흔한 병리들 중 하나는 또한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즉 그것은 사랑의 결핍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것은 슬픔의 병증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관계에서 실망과 배반을 경험할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방비 상태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는 유혹이 더 강해지고 우리는 삶의 위대한 기회를 잃을 위험에 처합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기회를.!

 

모든 사람이 바라는 행복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사랑기만 하면 얼마든지 많은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진정한 도전은 누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가 입니다. 얼마나 많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그들이 사랑 받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다시 삶에 자신의 마음을 엽니까! 얼마나 많은 사랑이 단지 미소로 마음 안에서 솟아 오릅니까! 미소의 치유. 그렇다면 우리의 연약함 그 자체가 우리의 연대 안에서 위로와 지지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 복음 13, 1 참조). 우리가 병과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십자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한정 없이 주시는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아드님의 얼굴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드러났는지 깨달을 때 말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은 조롱과 생색과 야유가 따라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용서하는 자비로 응답하십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이사야서 53, 5 베드로1 2;24).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약으로 치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우리의 고통을 떠안으시고 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허약함을 이해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몸소 인간적인 그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 15).


우리가 병과 장애를 경험하는 길은 우리가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의 지표입니다. 우리가 고통과 한계에 직면하는 길은 삶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자유의 척도입니다. 그 고통과 한계들이 무의미함과 부당함으로 우리를 공격할 때조차 그렇습니다. 이 환난 속에서 우리 흔들리지 맙시다(테살로니카 1 3, 3). 우리는 약할 때에 강해 질 수 있음(코린토 2 12, 10)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을 받습니다(코린토1 1, 24). 그 몸이 부활하신 주님 당신의 이미지 안에서 그 몸은 그 상처들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힘든 싸움의 흔적이지만 그 상처들은 사랑으로 영원히 변모됩니다.

 

(바티칸 라디오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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