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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6,24-34)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20 조회수1,43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618()/주일복음말씀묵상/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6,24-34)

 

 

 

마태6,24절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財物)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말한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믿는 이들은 항상 그것이 가능한 것 같다!

 

재물은 아람어 마몬(Mammon)이라는 낱말의 번역어이다. 이것은 돈과 재산을 지칭한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마몬을 주인으로 섬기다 보면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소외시키며 그분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제자들은 온 마음과 온 몸을 다 바쳐서 오직 한 분뿐이신 이 하느님을 섬겨야 함에도 말이다! 히브리어에서 사랑하다미워하다는 상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분명한 양자택일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재물에 쓴다면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께 사용할 때 우리의 사랑은 이미 소진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재물의 원칙은 하느님의 원칙과 정반대가 된다! ‘부자는 인자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자가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는 그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5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깊은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앞 구절이 우리가 재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식이나 의복과 같은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필요에 대해서조차도 걱정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이러한 종류의 염려가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재물을 섬기게 하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목숨이라는 말은 이며 갈망과 원함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혼을 음식과 관련시킨다. 예를 들면 음식이 없으므로 혼이 피곤하였다고 말한다(107,5).

 

25-34절의 주된 주제는 음식이나 의복에 관하여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재물을 섬기는 것은 아마도 음식과 음료와 의복에 대한 염려로부터 시작된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이것은 믿는 이들이 고귀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가?” 이것이 사람의 불신이다!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그의 불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매우 힘들 것이다. 모든 걱정들이 오직 하느님을 믿음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해 보기를 원하실 때마다 종종 다음의 질문을 던지실 것이다! 곧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첫 오일 동안 창조하셨고 육일 째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먼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준비하셨지만, 사람은 마치 그가 첫째 날에 창조된 것처럼 생각한다!

 

27절은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에 일 규빗이나 더 할 수 있느냐?”(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여기서 수명으로 번역할 수 있다.(시편39,5절의 일생과 비슷하다.) 이것이 주님이 제기하신 세 번째 질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걱정하지 않음은 누구에게 허락되는 또는 요구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하여 쏟을 시간과 힘이 없다(마태10,8-10).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삶의 가능성이 더 많이 박탈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경고는 믿는 이들에게 걱정을 아예 하지 말라든가 필요한 대비책마저도 몽땅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전체 단락은 작은 믿음에 대립해 참 믿음에 이르라는 초대이다(30). 27절은 신체의 크기를 두고 말한다. 들의 백합화는 자세히 규정할 수 없는 단순한 들꽃을 가리킨다. 마른 풀들은 그러한 들꽃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에게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26절과 28절은 하늘의 새들을 보십시오. 씨를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기르십니다. 여러분은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은 왜 옷에 대하여 염려하십니까?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수고를 하지 않고 물레질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새 법을 주의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이 새 법, 곧 생명의 영의 법(성령)은 작은 일에서도 큰 일처럼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

 

30절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는 구절로부터 우리는 이 말씀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걱정(염려)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실 수 있음에 대한 약한 믿음을 의미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문덕 생각나는, 어떤 위대한 영성가의 하느님과 함께한 그의 온 생애가 참새와 백합화에 관한 이 두 위대한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는 그의 고백이 기억난다! 그의 믿음의 실행은 이 세대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다!

 

31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사용되었다. 이것은 결론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와 백합화의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걱정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지, 일하지 말도록 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이 새를 바라보며 또한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모방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사도 바오로를 통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셨다(2테살3,10). 심고 거두는 것(26)은 남자의 일인 반면에 수고와 길쌈(28)은 여인의 일이다!

 

32절은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을 아십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 백성을 사랑하고 돌본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는 말은 이것이 믿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공급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나 혹은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공급하시지 않을 것이다.

 

33절은 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은 하느님의 오심, 곧 하느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나타나는 것에 맞추어 살며, 현재의 삶을 이 미래의 빛에 전적으로 비추어 형성하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그 의, 곧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데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 곧 왕국이란 무엇인가? 한 면으로 하느님 나라는 영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성경은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라고 말한다.

 

다른 한 면으로 하느님 나라는 천년 왕국(가톨릭교회는 이 부분이 왜곡 또는 숨겨져 있다!)에서의 통치를 가리킨다(루카19,11). 하나는 오늘날의 영적인 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의 보상이다. 현재의 믿는 이들의 영적인 상태는 바로 장래의 그들로 하여금 공동 왕으로서 다스릴 수 있게 한다! 또한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강조점은 장래에 있다!

 

여기서 의로움은 추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아버지의 의는 마태5,20절과 6,1절에 언급된 대로 하느님 나라의 새 법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를 말한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그들에게 주어지며, 또한 필요한 모든 것도 그들에게 더해질 것이다.

 

 

34절은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쉽고 안락한 생활을 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 준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결코 내일을 살아서는 안 되고 항상 오늘을 살아야 한다! “괴로움이란 걱정과 고통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신실한 믿는 이들이, 본향인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나그네로서 땅에 있는 날들이 결코 안이하고 안락한 날들이 아니라 괴로움과 고통의 날들이라는 것을 밝히셨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언제나 어김없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듯이, 내 영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이 그 괴로움을 기쁨과 평화로 승화시킨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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