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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 저 원수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21 조회수1,23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619/주일복음말씀묵상/ 주님! 저 원수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18,19-22)

 

 

마태18,19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누가 이러한 권위를 가졌는가? 오직 하느님 아버지시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고 또한 내 영 안에 계신다! 알렐루야!

 

다시라는 단어는 앞부분에 이 구절을 연결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첨가한다. 그러나 가톨릭성경은 이를 번역에서 제외해 버렸다! 중요한 실수이다! 19절은 다시 한 번 16절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19절은 가능한 한 17-18절에서와 같은 마지막 조취가 취해지지 않도록 경고하며 그렇게 하는 길을 제시한다. 곧 두세 사람이 그 형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그 기도가 응답된다고 확신해도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면서 같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18절의 묶고 푸는 것은 성령의 권위와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요한20,22-23). 만일 사람이 그 자신을 신뢰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잘못될 것이다! “땅에서하늘에서에 대응된다. 두 사람은 복수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다.

 

19절은 특별히 단체적인 기도를 가리킨다. 두 종류의 단체적인 기도가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능력과 은사를 해방하며 복음의 문을 여는 기도들, 그리고 고난, 죄짐 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기도, 둘째는 사탄, 악한 사람들, 예측할 수 없는 재앙들 등을 묶는 기도가 그것이다! “마음을 모아”, 곧 합심하여(hamony)라는 단어는 영어화된 형태의 심포니(symphony)라는 단어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를 들면 어떤 형제의 치료를 위해 기도할 때 한 사람은 하느님께 그 환자를 치료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으며(위하는 입장),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할 수 있다(중립적인 입장). 동시에 세 번째 사람은 하느님이 그 환자를 질병을 통하여 징계하실 것을 기도할 수 있다(대항하는 입장). 이렇게 할 때 합심함이 없다! 합심함은 모든 사람이 같은 견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20절은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는이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있으며, 이 단어는 그 다음의 문장이 하나의 예라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매우 귀하다. 그것은 왜 그들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을 받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내 이름으로 모인은 반드시 기도 모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혼자서 모임을 할 수 없으며, 모두가 부름 받아 주님의 이름 안으로 모인다.

 

예를 들면, 우리는 철과 같고 주님은 자석과 같다! 자석은 철을 끌어당기지만 동은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은 우리로 함께 모이도록 하며 주님의 이름 아래 모이도록 한다. 성경에는 종교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많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묵주기도나 개신교의 교파가 그것이다!

 

21절은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15절의 주제가 다시 채택된다. 아마도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은 지금까지 아무도 거의 말할 수 없었던 최고 정도를 뜻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 하루에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한 것으로 규율을 정해놓은 유명한 랍비가 있었다. 그러나 일곱 번은 세 번씩의 두 번보다 더 많다.

 

22절을 가톨릭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완전한 오역이다! 그러므로 마태18,22절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합니다.”라고 번역되어야만 한다!

 

지난 이천년 동안 수많은 성경의 번역이 나라별 교회별로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가톨릭 성경은 예외인 것 같다! 성경을 보지도 연구하지도 않는 가톨릭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상식을 넘어 이 정도의 도를 넘은 성경의 오역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에게 대답하였다라는 구절은 주님의 권위와 능력에 대하여 분명히 보여 준다! “일곱 번씩 일흔 번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이 없음을 말한다! 7(완전함) × 7(완전함) × 10(사람의 완전함) = 490(완전히 완전함)이다! (가톨릭 성경은 77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번역하였고,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고 각주에 부언하고 있지만 그것은 뒤바뀐 틀린 표현이다! )

 

이것은 온전히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18,23-35까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요구는 하느님의 용서에 근거한다. 우리 각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용서를 이미 받은 처지에 있다. 비유에 언급된 두 가지 빚(부채)의 양을 서로 비교하면 그 비례는 약 50,000,000 : 100이다. 이렇게 엄청난 비례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원한 죽음을 불러오는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도 역시 인간 사이에 얽힌 비교적으로 작은 허물을 용서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더 이상 없다. 이 점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도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마태6,12, 주님의 기도).

 

마태6,12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다가올 심판에서 이겨나기를 비는 청원이다! 나아가 주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 6,14-15절에서 왜냐하면 여러분이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도 여러분을 용서하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아버지도 여러분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더 12절로 돌아가서 여기에 제자들에게 특별히 더 중요한 점이 놓여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6,23-34절은 비유이다. 특히 35절에서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이라고 말한다! 많은 경우에 면전에서 혹은 입으로 혹은 행동에서 용서하지만 마음으로 부터는용서하지 않는다! 주님은 마음을 강조하신다!

 

만일 믿는 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옥에 갇힐 것이며 그가 진 빚 모두를 갚을 때까지 풀려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믿는 이는 용서받도록 간구해서는 안 된다! 너무 완고하고 강팍해서 머리를 돌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거절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친교(교통)하기를 거절하는 믿는 이가 없어야 한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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