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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7,6-14)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22 조회수1,153 추천수0 반대(0) 신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7,6-14)

 

 

마태7,6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개들과 돼지들은 특별히 2베드2,22절에서 언급된 것들로서 2베드2,21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2베드2,21-22절은 그들이 의의 길을 알고 나서 그들에게 전해진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돌아가 먹고, 돼지는 씻겨 주어도 다시 진창 속에서 뒹군다.’라고 하는 속담이 참으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교회의 입구에 머물면서 어떤 잘못된 교육과 사상을 받은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받지 않았다! 2베드2,22절은 돼지가 씻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씻음은 고상한 지식이나 사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영접한 죄 사함은 아니다!

 

특히 교회 안의 이단에 속한 거짓교사들의 더럽힘은 매우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변절이란 하느님의 진리의 올바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의 부담은 변절의 독에 대항하여 믿는 이들에게 예방접종을 하는데 있었다. 오늘날의 교회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성경에서 돼지는 구약에 자주 언급되며, 개들을 신약에서 자주 언급된다. 돼지와 개는 둘 다 부정하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하지 않으며, 개는 굽이 없고 또한 되새김질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둘 다 부정하다! 돼지는 피상적으로는 개보다 낫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영적인 상징은 양이다.

 

돼지는 아마도 소위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곧 밖의 좋은 외양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정도 진리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반면에, 개들은 밖의 모양이나 내적일 실제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상징한다. 필리피서는 우리에게 개들을 주의하라고 말하는 반면(3,2), 묵시록은 지옥에 개들이 있다고 말한다(22,15).

 

거룩한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거룩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가? 거룩한 것은 모든 영적인 것과 모든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계시나 진리, 곧 세례에 관한 진리나 떡을 떼는 것에 관한 진리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진주는 여기서 너희의 진주인데 그것은 당신이 개인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리킨다. 거룩한 것들은 하느님께 속한 일반적인 진리들이다. 진주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또는 특별하게 받아서 체험한 것들인 것이다.

 

12절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이 구절이 십계명에 관한 5,21-7,12절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의 결론이다. 여기서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라는 구절은 이 12절이 하나의 원칙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 보다 광범위하고 적극적임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구약에 있는 십계명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있다. 산상설교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과 상반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가르침들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과 동일한 노선상에 있다.

 

13-14절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과 요한10,9절의 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요한10,9절의 은 은총의 문인 반면에, 여기서의 은 천국의 원칙의 문이다! “좁은 문은 천국의 문이다! 이 좁은 문은 앞 구절에서 제시된 새로운 율법을 가리킨다. “들어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며, 그 길을 걷는 것은 실행의 문제이다!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은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며, 그 길을 걷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좁은 것은 주님의 명령의 엄격함을 상징한다! “좁은은 비교적인 용어이다! 위에서 언급한 율법이 좁은 문이므로 거기에는 또 다른 법, 곧 더 넓거나 혹은 더 관대한 법이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산상설교의 요구가 이전의 율법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여기의 두 문과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내적인 상태에 따른 것이며, 또 하나는 밖의 외양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문들 중 하나에 들어가거나 두 길 중 하나를 걷기를 선택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선택은 오늘 우리 생활의 원칙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좁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고서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갈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마태오복음 5-7장에 언급된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왜 그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멸망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파멸혹은 부패이며, 다른 하나는 멸망이다. 멸망은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 산상설교에서 제시된 길은 힘든 길이지만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서 이 길을 걸으라고 부르신다! 비록 거기에 외형적인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도덕성이나 윤리에 대한 요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넓은 문이요 넓은 길이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한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나 좁고 협착하므로 그 길은 단지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며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수용한다. 육신의 세상과 혹은 오늘날의 세상의 영광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없다!

 

좁은이라는 그리스어 낱말은 환난이라고 번역되는 낱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 길은 종말적 환난이 가득 찬 길이다(5,10-12).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문으로 인도한다! 이 길은 폭이 아주 좁다. 십자가의 그늘 - 그리고 빛 - 이 생명에 이르는 이 길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이것은 진리가 일반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좁은 문과 좁고 협착한 길을 찾을 필요가 있음은 그러한 것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의에 이르는 명확한 길을 제시하셨다! 그분이 요구하신 의(5,20)는 큰 문과 넓은 길을 통해 오지 않는다. 그것은 좁은 문과 좁고 길을 통해서 온다!

 

여기서 예수님은 큰 문과 넓은 길을 바리사이들의 외적 의에 견주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외적 요건이 아니라, 내적 변화를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킨 것이었다! 주 예수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을 찾는 이의 수가 매우 적을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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