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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저를 부르셨으니.... /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강론글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6-06-30 조회수1,314 추천수1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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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불편하시지만 우리 옆에 사람들과 같이 인사 나눠보시죠.

 

안녕하세요~~

영성의 집에 계신 분들도 안녕하십니까?

아~ 지금 영성의 집도 꽉 찼다고 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들 많이 오셨습니까?

지난달에 제가 없어가지고 눈이 짓물러서.....정말로 그랬어요?

네~~

저도 그랬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런 불편함 때문에 이 성지에 찾아오신 목적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랬죠?

마귀는 여러분이 집을 나설 때부터 쫓아와 어떻게 해서든지 분심 들게 해서

오늘 받을 은혜를 망가뜨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주 계략을 묘하게 짜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거 이겨내야죠?

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죠.

은총의 빛이 강하면 역시 어두움도 같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축복이 올 때를 제일 조심해라.’ 그런 성인들의 말이 있어요.

‘은총이 내릴 때가 가장 경계해야 될 때다...’ .

어떤 분들 뭐 예를 들어서 여러 가지 영성적인 세미나, 성령세미나...

이런데 참석해서 은혜 받고 눈물 콧물 흘리고....

대로 천국처럼 살 것 같은데 세미나 받고 나서 막 떨어지죠?

 

에페소서 4장 1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에페소서 4장 1절

발음을 잘못하면 얘를 패는 게 됩니다.

또 발음을 잘못하면 얘를 빼는 게 됩니다.^^

에페소서 4장 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따라 해보세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4월 기도찬미의 밤 때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받아 삼키십시오.

아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어디에 나온다구요?

에페소서 4장 1절~

여러분들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제가 아까 별 얘기를 다 했어요.

얘를 패라는 얘기도 했고 얘를 빼라는 얘기도 하고......

그 뜻은 뭐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제자로 써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따라갔듯이...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발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불러주셨기 때문에 이 기도 찬미의 밤에 왔음을 믿습니다.

아멘.

우리는 애초에 하느님과 인연을 맺을 때부터 우리 쪽에서 선택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 프로 하느님 쪽에서 우리를 부르셨던 겁니다.

불러주셔서 교리를 배웠음을 믿습니다.

아멘.

우리를 불러주셔서 세례를 받게 했던 것 또한 믿습니다.

아멘.

우리를 부르셔서 레지오 단원 봉사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사제인 저는 주님이 불러주셔서 사제가 되었음을 또한 믿고 있습니다.

아멘.

 

내가 하느님을 선택했다고 하는 이 생각은 내가 선택했으니 언제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교만한 마음과 연결이 됩니다.

부르심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멀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그 생각은 다른 이들에게 뭐로 나타나야하겠습니까?

겸손으로 나타나야 되고,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구체적인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의 갑옷을 입어야 되는데

바로 이러한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늘 천국을 향한 말이 나와야합니다.

소위 천국 팔언이 나와야 됩니다.

 

자, 여러분들... 천국 팔언, 뭐가 있을까요?

이게 무슨 표시예요?

보통 ‘사랑합니다.’ 하는 건 다 알아요.

 

첫 번째, 감사합니다.

이 천국 팔언의 첫 번째가 ‘감사합니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입에서 ‘감사합니다.’ 소리 몇 번하셨습니까?

작년 일 년 동안 살면서 여러분의 입에서 ‘감사합니다.’소리를 몇 번이나 하셨습니까?

감사하더라도 데살로니카 전서에 나오는 대로 ‘범사에 감사하라.’ 그랬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감사할 일이 생기면 우리보다 더 감사합니다.

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좋은 일이 생길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어쩌다가 감사할 수 있어요.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거, 쉽질 않습니다.

아침에 학교나간 아이가 트럭에 치여 중환자실에서 할딱거리며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때

그 앞에 가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서 안 뻗게 해줘서....’ 이말 안 나와요.

‘하느님 뭐야? 내가 얼마나 봉사하고 하느님 위해 애를 썼는데 하나밖에 없는 애새끼 이렇게 만들어?’

우리는 그때에도 감사하셔야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 천국 팔언의 첫 번째.

 

두 번째, ‘미안합니다.’

이 말은 겸손의 덕을 표시합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분명히 내가 잘못한 거 아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미안합니다.’ 말이 안 나옵니다.

남편한테 이말을 해야 되고, 아내한테 이말을 해야 되고, 내 부하직원한테도

이말을 해야 되는 걸 알고 있지만 ‘미안합니다.’ 말이 안 나옵니다.

‘미안합니다.’ 는 말은 겸손을 지향하는 아주 특별한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소리 해야지요.

내가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한테 미안한 건 미안한 겁니다.

아무리 사제라 하더라도 신자들한테 미안할 때는 정직하게 ‘미안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겸손합니다.

 

세 번째,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가락을 잘 맞춰야 돼.^^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칭찬으로 들려야 됩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훌륭하다는 소리를 자꾸 들으면 그런 사람으로 변해갈려고 노력하겠죠?

못난 놈 보고 자꾸 ‘못난 놈’ 그러면 그 사람은 정말 못난 사람이 되고 잘난 사람보고도

‘너 못났다.’ 하면 못난 사람이 되요.

그러나 못난 사람보고 ‘너, 훌륭하다. 너, 정말 이런 좋은 장점이 있지 않느냐?’

남편에게도 뭔가 세상살이가 고달퍼 보일 때,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남편한테

‘당신 정말 훌륭한 사람이야.’ 자꾸 격려하면 그 남편은 힘이나요.

‘훌륭합니다.’ 이것도 천국을 여는 천국 팔언 가운데 삼위에 속합니다.

 

네 번째 천국 팔언은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네, 이것은 바로 관용을 나타냅니다.

관용, ‘괜찮습니다.’

관용이라고 하는 것은 불의를 보고 눈감아 주는 것이 관용이 아니지요.

성서에서 나오는 관용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팔언은 ‘자~알 하셨습니다.’

‘자~알 하셨습니다.’

요거는 이해를 의미합니다.

이해

 

여섯 번째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요거는 위로를 의미합니다. ‘위로’

 

일곱 번째는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요것은 축복을 인정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에게 받은 것이 안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데 우리들은 행복을 못 느끼고 살아갑니다.

겸손되이 하느님에게 받은 많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까?

 

여러분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죠?
사제도 분명히 행복해야 됩니다.

사제로 살면서 불행하게 산다면 정말 비참한 삶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도 행복해야할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하느님 앞에 ‘주님 저는 행복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하구요.

성모님이 계시기에 행복하구요.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구요.

한 달에 한 번씩 성모님 품을 찾아서 감곡성지에 찾아올 수 있어서 행복하구요.’

아멘.

 

행복을 찾아보다 보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입에서 ‘행복합니다.’

옛날에 어느 가수가 ‘나는 행복합니다.’노래 했죠?

 

마지막 여덟 번째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덕을 의미합니다.

 

천국 팔언

다시 한 번 얘기해 볼까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훌륭하십니다.

괜찮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바로 이 천국 팔언이 주님께서 불러주신 자의 입에서 나와야 될 말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천국 팔언을 하는 사람이 앞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뭐라 그러느냐?

‘당신 멋져. 당신 멋져’ 그래요.

근데 이 당신 멋져는 뜻이 있어요.

자~ 여러분들이 ‘당’ 해보세요. 제가 풀이할께요.

‘당’ - 당당하게

‘신’ - 신나게

‘멋’ - 멋들어지게

‘져’ - 져주면서 살자.

이게 바로 ‘당 신 멋 져’

신나고 당당하고 멋지게 져주면서 사는 것이 뭐냐!

한마디로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기까지도 힘들지만 부활을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부활에 이르기까지 수난과 고통을 참는 것, 참아서 부활하기까지도 힘이 들지만

부활한 후에 부활신앙을 유지해나간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어렵죠? 안 쳐다볼 줄 알고....졸면 안 됩니다.

가끔 쳐다볼 겁니다. 여기 옆쪽도....저쪽도 마찬가집니다.

옆에 있다고 해서 실컷 졸면 안 됩니다.

부활한 후에 복음서는 두 가지의 사건을 전합니다.

빈무덤 앞에서 울고 서있던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가 나오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 이 두 사건이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첫 번째가 어떤 사건이였다구요?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서있던 막달라 마리아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어요.’ 엉엉 울고 있었어요.

주님 어디 계신지 안다면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알았다고 나옵니까?

요한복음 20장 11절 이하에 동산지기로 알았다 그랬어요.

그러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야!’ 하고 예수님이 이름을 불러줬을 때

눈이 딱 열려서 예수님인 걸 안 거예요.

그만큼 이름은 참으로 중요해요.

 

셋째 동생이 사제라는 거 아시죠?

아는 분은 알고 모르는 분은 지금까지 모를 겁니다.

셋째 동생이 사제인데 그 셋째 동생은 어릴 때부터 이 큰형이 우상 이었어요.

그래서 큰 형 따라서 신학교도 들어왔고 말하는 거, 걷는 거, 목소리까지

큰형하고 똑같아 지려고 지금껏 살아.... 그러니까 나는 내 동생 신부를 생각해서라도 잘 살아야 돼!

그 책임을 느껴요.

동생 신부가 초등학교 때, 아이들이랑 싸울 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뭔 줄 알아요?

‘너 우리 큰 형 이름 알어?’

‘김웅렬이 알어?’

왜냐? 그땐 내가 초등학교 때 싸움 짱이었거든.^^

‘김웅렬’ 이름 석 자만 대면 동네아이들 내 동생 절대 못 건드렸어요.

그래서 우리 동생은 내 이름 가지고 먹고 살아 아예.....

한 십여 년 전에 피정을 갔더니 점심시간에 어느 분이 저에게 오시더니 명함을 주는데 보니까

울산공대 교수예요. 공학박사였어요.

자기가 아주 심각하게 신부님 이름을 연구했는데.

사제를 만들려면 무조건 ‘웅’자를 붙여야 된데요.

지금 한국에 삼웅이 있는데 첫 번째 김웅렬, 두 번째 오웅진, 세 번째 강길웅....

그 형제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아무튼 사제를 만들려면

가운데 붙이든 마지막에 붙이든 아무튼 ‘웅’자 붙이면 성공한다 이거예요.

대단한 연구를 저에게 해주셨어요.

 

제가 90년대 한 십년동안을 중국 선교를 나갔습니다.

그때는 등소평이가 개방 정책을 써가지고 선교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광하러 나가서 몰래몰래 피정을 다녔어요.

중국은 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성에는 종교국이 있고, 그 종교국장과 카톨릭 회장이랑 얼마나 평소에 사이가 좋으냐에 따라서

내가 가서 피정을 시켜도 종교국장이 이렇게 모른 척 할 수도 있고......

사이가 안 좋았다가는 당장 끌려 나가요.

4년 동안 조선족 피정을 시켰고 4년동안 한족들, 중국사람들... 피정을 시켰습니다.

 

소팔가자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처음에 천주교 신자 여덟 집이 시작됐다고 해서 팔가자입니다.

그때 당시 갔을 때 한 천이백 명이 왔는데.... 천이백 명 가운데 천백명이 천주교 신자예요.

마차를 타고 옥수수밭 사이로 들어갔더니 마을이 나와요.

끝도 안 보이는 옥수수밭 사이에 동네가 있어요.

옛날 영화에 ‘대지’라는 영화 있죠?

그런 느낌이야.

그런데 마을 한가운데 성령상이 있어요. 비둘기 모양으로....

동네가 다 천주교 촌이니까.....

그리고 팔백 년 된 성당이 있는데 회장님이 종을 삼십분을 치니까

그 넓은 옥수수 밭에서 개미처럼 꼼지락 거리면서 신자들이 몰려드는데

순식간에 그 성당 마당에 구백 명이 모였어요.

평일미사를 구백 명, 천 명씩 하는 데예요.

근데 거기가 옛날에 김대건 신부님이 조선 땅으로 들어오기 전, 부제 때 삼년을 머물던 장소예요.

최양업신부님이 또 조선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삼년을 머물던 장소예요.

거기 신자들은 우리 옛날에 여기 있던 조선신학생이 사제가 돼서

지금 성인품에 올랐다는 걸 다 알아요.

그때 갔더니 놀랍게도 ‘대건’이가 그렇게 많아 아이들이....

‘김대건’

대건이야 한자까지 똑같아요.

제가 거기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님 추모현양 묵상회]라고 하는 현수막타이틀을 걸고

일주일 동안 통역을 써가면서 한족들에게 역사적인 피정을 시켰습니다.

 

사실은 조선족 자체가 서울말을 이해 못하는 게 많아요.

그러니까 내가 열 개를 얘기하면 조선족은 일곱 개 밖에 못 알아들어요.

그 조선족이 다시 중국말로 통역을 해주면 실제로 내가 열 개를 얘기해도

앞에서 듣는 한족들은 다섯 개밖에 못 알아들어요.

근데 놀라워요.

웃어야 될 때 웃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울어야 될 때 울어요.

그 얘긴 뭐냐?

못 알아듣는 다섯 개 대신에 뭐가 들어가 있느냐?

성령이 같이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5일동안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신부가 가서 뜨거운 피정을 눈물로써 했어요.

작별을 하고 2년 후에 다시 소팔가자를 갔더니...

세상에~~~ 낳은 아이마다 다 웅렬이야.

내가 피정지도를 하고 떠나고 난 다음에 낳은 아이는 전부다 웅렬이야.

그게 96~ 7년 얘기니까 한 10년이 넘었죠?

아마 12살, 13살 된 아이들은 지금 전부다 웅렬일거예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참 특이하고 신기해

내가 감곡성당에 와서 못 하고 있는 게 한 가지가 있어.

다른 성당에서는 늘 했었거든...여기서는 2년 반 동안 딴 거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가지고....

못한게 있어요,

항상 이름포를 만들어 가지고 미사 때는 이름표 꽂고 성당 떠날 때는 떼라고 했어요.

이름표를 가지고 성체를 받으러 나올 때는

“루시아, 그리스도의 몸!”

“베드로, 그리스도의 몸!”

사제의 입에서 자기 본명이 불러졌을 때 가슴이 울렁거려요..

 

마치 여러분들 ‘자캐오’ 이야기 아시죠?

돈도 많고 권력이 있는 세리장이었지만 가슴은 펑 뚫어져 있었어요.

동족으로부터 왕따 당하고 그러던 어느날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신다고 했어요.

자캐오가 키가 적어요? 커요?

너무 작아요.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놈 얼마나 미워했겠어.

발로 차고....뚫고 들어갈 재간이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보다 앞질러가서 무화과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지요.

평상시의 비단을 칭칭 감았던 그 옷을 입고는 나무에 절대 못 올라가요!

옷을 훌훌 벗어버립니다..

그건 뭡니까?

이제껏 가장 귀하게 여겼던 돈, 명예 이것을 다 포기한다는 그 뜻이에요.

세리장이면 기관장이었어요. 나무를 타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점잖은 양반이....

나무로 기어 올라가서 배를 붙이고 기었겠지요.

그 때 예수님이 딱 지나가셔!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자캐오를 보고 뭐라고 그래요...

이름을 불렀어요.

“자캐오야!”

자캐오가 그 전에 에수님 만난 적 있어요?

없었어요.

저 양반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자캐야, 이리 내려오너라!”

자캐오라는 이름을 불렀을 때 5만 볼트 전기에 짜르르~~~

감전이 되어서.. 자캐오의 인생은 끝난거야!

예수님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리아야!“ 하고 이름 불러주었을 때

예수님을 봤듯이....

저는 그래서 신자들의 이름을 늘 불렀어요.

교우들끼리도 밖에 나가서 본명 잘 모르잖아요.

“어, 루시아씨”

“어, 베드로?”

형제님, 자매님.....

떠날 때는 그렇게 할 거예요.

이름이 그만큼 중요해요.

 

빈 무덤을 지키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마리아야!” 하는 이름을 불렀듯이

오늘 이 밤에 하느님께서는...성모님께서는 여러분 각 자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지요.

30리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성서에 보면 눈이 가리워져서....

한평생 내 옆에서 같이 계신대도 불구하고 내 눈이 가리워져 있을 때는

절대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지요.

 

우리 인생살이에서 우리 눈을 가리는 게 무엇입니까?

첫 번째 두려움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탄로가 날까봐...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 잡혀 들어 갈까봐....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대도 주님께 매달리기 보다는 세상 것에 매달려 사는....

세례 받고 난 후에도 점집, 철학관, 무당한테 들락거리는 신자가 30%가 넘어간대다는 통계예요.

이게 천주교신자들의 현주소예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두려움이 어디 있어요?

 

두 번째로 무엇이 우리 눈을 가리고 있을까요?

앞날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예수 따라 다니다 쫄딱 망했다!

예수가 왕이 되면 논공행상에 의해서 뭔가 한 자리 얻을 줄 알았는데...이게 뭐야 인생 망첬다...

앞날에 대한 불안 ‘뭘 먹고 살아갈까!’

 

세 번째 우리 눈을 가리는 게 상실감

 

네 번째 우리 눈을 가리는 것 분노예요.

분노에 가득 차 살 때에는 예수님을 못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너무 믿었어요.

그러나 그 믿음은 세속적인 믿음이었지요?

그 믿음이 깨지니까 보복으로 바뀝니다.

이게 바로 약한 인간의 모습이지요.

빨마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셨던 그 분이 비참하게 죽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가 바로 보복으로 이어져요.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요!

 

두려움, 분노, 앞날에 대한 상실감....

이런 것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예수님을 못 보게 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늘 투정을 합니다.

주님, 내가 힘들 때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나는 왜 늘 혼자 살아야 합니까?

내가 힘들 때 손 한 번 잡아주셨으면...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텐데....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셨는데도 항상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떤 이가 살아왔던 길을 뒤돌아보니까 평지에는 자기 발자욱과 또 한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대요.

그게 누구 발자국?

예수님 발자국

가파른 산비탈 올라갈 때는 자기 발자국밖에 없었대요.

‘아, 이때는 주님이 나를 떠났구나! 나 혼자 이 높은 산을 고생을 하면서 넘어왔구나!’

불평을 했습니다.

주님. 내가 뒤돌아보니까 힘들 때 내 발자국밖에 없었어요.

그때 주님, 어디 가시고 나 혼자 높은 산을 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하시는 얘기가

“이놈아, 그 발자국은 니 발자국이 아니고 내 발자국이야...

내가 너를 업어서 날랐기 때문에 니 발자국은 없고 내 발자국만 남은 거야...

내가 너를 업어 나르느라고 등골이 다 빠진 것 너는 모르냐! "

30리 길을.... 3시간을.. 예수님과 가면서도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단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어요.

엄마가 걸음마 가르칠 때 어떻게 해요?

뒤에서 아이 옷자락 잡고 ‘아이고 내 새끼, 잡고 걸어 봐!’

엄마는 손 슬그머니 놓고 문지방 뒤에서 어떻게 하나...봅니다..

애가 걷다가 엄마가 없는 것 같으면...뒤 돌아보다가 넘어지지요?

엄마는 언제든지 슬라이딩 을 해 가지고 애를 잡을 준비하고 있어요.

애 눈에만 엄마가 안 보이는 것이지...엄마의 시선은 단 1초도 그 아이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어요.

 

언제까지 예수님, 우리 뒤만 잡고 있어야 됩니까?

우리 발로 걸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놓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놓더라도 그 분의 시선마저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같이 가도.... 이 등신들이 당신을 못 알아보아도....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에 관한 기사는 다 찾아서 설명을 해 주셔요.

이럴 때는 이런이런 얘기가 있었잖아~

그래도 두 제자는 완전히 못 알아보았지요.

 

성서 설명하면서 하두 속이 상하니까

‘너희들, 참 어리석기도 하다!’

 

성서에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뜻이 있지요

첫번째,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분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순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서에 ‘너 어리석다!’는 말뜻은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순명하지 않는구나!

 

성서에 어리석은 짐승, 뭐가 대표적으로 나옵니까?

<당나귀>

그 어리석고 고집 세고 뒷발질하고....

한 번 화나면 주인이 아무리 잡아끌어도 버티고.... 교만의 상징이요,

고집덩어리의 상징인 당나귀를 성지주일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가서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고 고집 센 나를 주님이 쓰시고자 합니다.

주님은 그 고집덩어리 당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에 입성하십니다.

여러분이 이태까지 살면서 주님이 여러분 쓰시겠다고 한 적 여러 번 있었을 거예요.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수녀님의 입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 그럴 때마다

‘저 불러주시고 쓰십시오...능력이 미약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애써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인데... 과연 얼마나 우리는 순명했고

분별력을 가지고 ‘네’ 했고 지혜롭게 대답했던가요.

 

성서는 머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그토록 성서말씀을 통해 설명을 했건만 못 알아들었습니다.

성서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학문적으로만 연구하면

성서 안에 계신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죠.

 

저는 사진을 오래전부터 찍었어요.

사진을 찍을 때, 아무리 렌즈가 좋아도 마음으로 읽고 찍지 않으면 올바른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쁜 카메라라 하더라도 마음으로 읽으면 메시지가 반드시 담깁니다.

 

율법학자들은 성서전문가들이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본당에서 할머니가 까막눈이라 성서를 읽고 싶어도 읽을 재간이 없어요.

너무 너무 성서가 읽고 싶은데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니 성서를 못 읽지요.

이 할머니가 기도를 해보니 지혜가 떠올랐어요.

성당에 오셔서 맨 앞자리에 앉더니 가방에서 종이 세 장을 꺼내셨어요.

빨간 종이, 까만 종이, 세 번째 흰종이...

빨간 종이를 이렇게 들고 눈을 감고 묵상을 하세요.

그 다음에 까만 종이를 들고 묵상을 하세요.

마지막으로 흰 종이를 들고 묵상을 하세요.

본당 신부님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할머니가 ‘이제 맛이 갔나보다!’

조용히 가서 “할머니, 카드 섹션하는 것도 아니고...그것 들고 뭘 하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글을 못 읽습니다...제 나름대로 빨간 종이를 이렇게 쳐다보면

예수님 수고수난이 생각이 나요. 예수님 피 흘리신 ... 까만 종이를 이렇게 보며 죽음을 묵상하고,,,

마지막으로 흰 것은 뭐겠어요?“

흰 것은 부활묵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서학 박사보다도 그 할머니의 묵상이 기가 막힌 거예요.

 

하느님은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정확하고 또렷하게 드러내주십니다.

 

미사 때, 사제는 복음을 설명해 주시지요.

물론 재미있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5분을 하더라도 30분보다 길게 느껴지는 강론이 있고

1시간을 떠들어도 5분처럼 빨리 지나가는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의 반응이 다르겠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설교를 하셔도 조는 인간은 끝까지 좁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못 알아듣습니다.

어리석다는 뜻 세 가지가 뭐라고 했지요?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순명치 않는 자는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코와 귀에 대고 설명을 해 줘도 좁니다.

말씀 불감증 환자는 하느님을 모르지요.

 

엠마오까지 가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초대해서 같이 빵을 나눕니다.

예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엠마오 제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상징적인 단어는

눈이 가리웠다! 눈이 열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통, 십자가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악이지만...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고독의 수치가 올라갈수록 우리 영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내 안에 있던 인간이 밀려나가면서 그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악입니다.

선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어느 누구나 고통을 당하면 외롭고 분명히 인간을 괴롭히는 것인데

남편은 죽고 싶은데....마누라는 옆에서 코를 드르렁~~ 골면

‘아, 나 혼자구나!’

외롭습니다.

고통가운데 혼자가 될 때 하느님을 다른 때보다 쉽게 만나기 때문에

신비스럽고....예수님 볼 수 있다는 걸 겁니다.

 

두 번째, 우리 눈의 영을 열리게 하는 것은 영적 포기입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쁨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적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행복해 질 겁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영의 눈이 열립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입니다.

빵을 떼어 주실 때 그 때 눈이 열렸다.

일일 피정을 시키면 저는 반드시 파견미사를 원합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말씀으로 치유가 알어나지만 결정적으로 빵을 떼어서 나누어 먹을 때,

즉 영성체할 때 완벽한 치유가 일어나요.

그렇기 때문에 피정을 했어도 파견미사 없는 피정은 고무줄 없는 팬티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서서히 치유가 되다가 성체를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

완전한 영과 육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성체성혈 축성할 때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제단 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미사를 미치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온 아이가 팔에 매달리면서

“신부님, 예수님 몸 이렇게 들 때 천사가 날아온 것 봤어?

성모님이 이렇게 팔 벌리고 신부님 끌어안는 것 봤어? ”

‘응, 뒤에서 인기척은 났어!’

못 봤다는 얘기 차마 못 하겠고... ‘참 사람 있었는데 내가 못 봤어..’

애들은 그런 애기 참 많이 했어요.

사제 생활 하면서 그런 이야기 참 많이 들었어요.

영이 맑은 아이들은 봅니다.

 

성체성혈 축성할 때 이 성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 봅니다.

어떤 아이는 성모님의 옷 색깔을 표현하는데

‘성모님 그 옷 있잖아 ...그 색깔....그 색깔...’

그 아이들이 거짓말 하지 않겠지요.

 

사제들이 축성할 때는 천사들이 날라 다니면서 성체를 지킵니다.

성모님이 사제를 지킵니다.

축성된 성체 앞에서는 성모님도 무릎을 꿇으십니다.

 

성체를 정성껏 잘 배령하는 사람은 말씀을 잘 깨닫는 은혜를 같이 받습니다.

빵을 떼어서 먹고 난 후에 제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 줄 아시지요?

‘길에서 그 분이 말씀하실 때 뜨거움을 느꼈어....’

‘맞아..맞아!’

성체를 영하고 난 다음에야 그날 하루 종일 들은 그 피정의 말씀이 완전히 내거가 되는 것이지요.

 

말씀 밖에 없고 성체가 없는 개신교는 구원의 문 안으로는 들어와 있지만

성체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보증은 없습니다!

성체가 있고 없고.... 천주교와 개신교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개신교신자들의 살면서 그들의 신앙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지만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예요.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성체!

 

성체를 영한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이고

성체를 영한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서 봉사하는 것이고

성체를 영한 천주교신자들은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서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입니다.

 

평일미사든 주일미사든 여러분 성체를 모실 때 성체를 통해 치유받으려면

성체를 배령하기 합당한...

적어도 내가 대죄가 있을 때는 하느님과의 다리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무조건 손바닥 내밀고 혓바닥 내민다고 되는 것 아니지요?

대죄상태에 있을 때에는 성체를 영해도 성체가 아닙니다...모령성체입니다.

 

사제들은 미사 전에 늘 고백소 안에 있습니다.

끊어졌던 하느님과의 다리를 잇고, 오늘 성체를 영하러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마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사를 못 보게 합니다.

보더라도 모고해를 하게끔 유혹을 할 겁니다.

절대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성체는 천상약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뛰어 내려갑니다.

그 다음 날 가는 게 아니지요?

베드로장모가 열병 치유 받고 난 다음에 즉시 일어나서 시중을 들었다.

성령을 체험한자, 말씀을 체험한자, 성체를 체험한 자...

그들의 사전에는 내일이라고 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즉시 곧 치유를 시킨 목적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즉시 일어나서 ...

엠마오 30리길을 내달려 달려갑니다.

30리 길을 갔더니 시몬 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실재성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이래서 생겨난 것이 뭐냐?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체험을 통해서 나타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살아가고 있지요!

여러분들이 매달 이곳에 오신다 하더라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아무소용도 없습니다.

천국 팔언을 기억합시다...

당신 멋져~~도 기억합시다.

‘당’ - 당당하게

‘신’ - 신나게

‘멋’ - 멋들어지게

‘져’ - 져주면서 살자.

그 다음에 건배

 

오늘 주신 은혜...치유의 성지, 구마의 성지, 믿음의 성지에 불러주신

성모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오늘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냉담중인 가족 기억하시고.....

앓고 있는 가족 기억하시고....

내 가족만 아니라 내 집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기억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8. 4. 05 (찬미의 밤) 가르침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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