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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0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01 조회수1,415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6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독서 아모 8,4-6.9-12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9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10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12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복음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벌써 7월의 첫 날입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면 늙은 것이라고 하는데,

세속적인 나이를 볼 때는 아직도

 청춘인데 마음이

늙었다는 증거일까요?

아무튼 올해의 반환점을 도는 오늘,

지금까지 다짐했던 것들을 다시금

점검하면서 정말로 멋지고 행복한

후반기를 만들어 나가셨으면 합니다.

혹시 벌써 상반기가 지났다면서

틀려버렸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요즘에 저의 여덟 번째

출판을 위해서 계속해서

교정을 보고 있습니다.

출판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판이

왜 이렇게 미뤄진 것일까요?

바쁘다는 이유를 들고 있었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다음에’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이 일만 마치면 다음에....’,

‘저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에....’

등등의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잡고 책상에 앉아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

벌써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일에서든

 과감한 시작이 중요합니다.

언제부터 공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지금 당장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을 열심히

써 보겠다는 마음가짐보다는,

지금 당장 펜을 들어 첫 글자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이 말씀하셨던

 ‘등산을 갈 때 가장 넘기 힘든

봉우리는 자기 집

현관 문턱이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집밖만 나서면 벌써

 산의 70%라고 하던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우물쭈물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신 일단 과감하게 시작하는

내가 되어야 앞으로 할 후회들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

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마태오는

 어떻게 했을까요?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이

 벌떡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가족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재산도

정리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그 모든 것들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에 자신의

모든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 없이 주님을

따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다음에....”,

 “저는 능력이 없어요.

 능력이 생긴 다음에....”,

“세상의 것들을 더 즐기고서 다음에....

따를게요.” 등등의 ‘다음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조건 주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예”라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가슴으로만 볼 수 있다.

(생텍쥐페리)

강화도의 선두포구입니다.

장군과 찻잔

(‘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느 나라에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렬한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숙소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마침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난 장군은

귀히 여겨 보관하고 있던 찻잔을 꺼

내어 차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그만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져

놓칠 뻔한 것입니다.

다른 손으로 다급히 찻잔을 잡아

깨지는 사고는 모면했지만,

장군의 가슴은 순간 철렁했습니다.

 아끼던 찻잔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간 장군은 조금 전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아끼는 부하들이

눈앞에 쓰러져 갔을 때도,

적군에 포위되어 자신과

병사들의 목숨이

풍전등화 같던 때에도,

그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사의 목숨보다 작은 찻잔

하나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책임져야 할

장군의 태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장군은 깊은 반성과 함께

그리도 소중히 여기던 찻잔을

그 자리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내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쫓는

현명한 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어제 먹었던 맛있는 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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