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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1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11 조회수1,430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6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독서 이사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복음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몇 달 전에 저는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생활 안에서 불편한 점이 많아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코 안쪽에

혹이 나 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악성은 아니고 물혹이라서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지만,

 이 물혹으로 인해서 심한 비염이

 생길 수가 있고 또한 냄새를 잘 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물혹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거나, 또는 약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잠시 약으로 인해

진행을 멈출 수는 있지만 완전한 치료는

수술을 통해 물혹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직 이 물혹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성지의 일과 제 개인적인 일정이 바빠서

도저히 며칠을 연속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혹시라도 염증이 생기지는 않을까,

또 전에처럼 냄새를 못 맡아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제거해야 할 물혹을 계속하고

가지고 있다 보니 마음이

평화롭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물혹을 과감하게

 제거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때로는 제거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을 떠올려보십시오.

적군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분명히

평화가 깨집니다. 이 평화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항복하면 될까요?

 물론 적군이 스스로 물러나면 좋겠지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싸워 물리칠 때

비로소 평화를 되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라고 말씀하시지요.

 평화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먼저 평화를

빌어주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평화의 주님이 아니라,

사실은 폭력의 주님이라는 말씀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바로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것을 과감하게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평화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조금만 참으면 하는데 뭐...’라면서

꾹 참으면 이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롭게 살자.”면서

 복잡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

큰 미덕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

불의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참 평화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과연 평화로운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일한 상태를 평화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너 자신뿐이다.

(에머슨)

베네딕토 성인과 스콜라스티카 성녀.
‘질’과 ‘잘’

(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국어에서 ‘질’이라는 낱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질’처럼 접미사로 사용될 경우,

 명사, 의성어 또는 어근 뒤에

붙어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는데요,

 예를 들어 ‘싸움질’, ‘자랑질’처럼

 좋지 않은 행위를 더욱더 비하하는

뜻으로 종종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이라는 낱말이 항상

나쁘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품질이 좋다', '질감이 좋다' 등과 같이

‘사물의 속성, 가치의 총체’,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이루는 근본 바탕’

등의 의미를 가지며

 좋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모양과 발음의 차이

 때문에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어느 가요의 가사처럼 '질'에

점 하나만 붙여서 ‘잘 한다’,

‘잘 산다’ 등과 같이 '잘'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부사가 됩니다.
이처럼 같은 말, 같은 내용이라도

 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좋은 표현이 될 수도 있고,

나쁜 표현이 될 수도 있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그렇지 않을까요?

자그마한 말 하나의 변화로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으며,

별 생각 없었던 행동 하나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과 행동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을까요?

몬테카지노의 베네딕토,

스콜라스티카 성인성녀 남매의 유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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