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1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13 조회수1,344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6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독서 이사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복음 마태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몇 해 전, 부산에서 강의를

마치고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 위해 김해 공항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런데 교통 체증이

너무나 심해서 아무리 계산을 해도

제 시간에 맞춰서 공항까지

가기가 힘들 것만 같았습니다.

 버스 기사님께 탑승 시간을

말씀드리면서 갈 수 있느냐고 하자,

 교통 체증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순간 짜증과 언짢은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연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스 기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손님, 그냥 다음 비행기

탄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안달복달해봤자

공항까지 가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안달복달

 한다고 해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두르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공항 게이트를 잘못 찾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부딪혀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냥 비행기를 놓치면 놓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인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의 상황과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일 때

많은 부분이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받아들임을 쉽게 선택하지 못합니다.

내가 옳다는 자기중심의 생각,

세속적인 욕심이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이 배웠고 또 많은 재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도 자기보다 잘 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굴복이나 복종, 행동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면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감춰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지혜와 슬기를 내세워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부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노력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도 있지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상황이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철부지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적당히 채워라.

그릇에 물을 채울 때

지나치게 채우고자 하면

 곧 넘치고 말 것이다.

 모든 불행은 만족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최인호)

주님께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정면에서 부딪쳐서 이겨낼 수 있는 지혜

‘지푸티’라는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이 왠 ‘지푸티’라는

생각이 드셨지요?

아마 ‘지푸티’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도 모를 정도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의

아주 자그마한 나라인 ‘지푸티’의

대통령 선거에

관심을 누가 가질까요?

그 나라에 살고 있거나 또는

그 나라에 연관이 있지 않은 한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심이 생기고

또한 어떤 감정의

동요가 이루어진다면

 나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지 않고

또한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지 않으며 그래서

 동시에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렬할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강렬한

감정 중에서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감정이 들 때에는

아예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피하고

피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정면에서 부딪쳐서 이겨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비행기 사진을 보니 타고서 훌쩍 어디 좀 가고 싶네요. ㅋㅋㅋ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