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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당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13 조회수1,40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710/주일복음말씀묵상/ (2)당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루카10,25-37)

 

본래 당신은 자신이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본래 강도가 당신을 때린 것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당신의 옷은 벗겨지고 자신이 거의 죽었는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제와 레위인은 와서 무엇을 했는가? 아마도 그들은네가 강도에게 매 맞고 옷이 벗겨지고 거반 죽은 것도 모르느냐?’이렇게 말한 듯하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왔는데, 그는 누구인가?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그는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여행하는 사람이다. 곧 사제와 레위인은 우연히 지나간 사람들인 반면에, 이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자로서 그를 구원하려고 일부러 온 사람이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그에게는 사랑과 자비가 있는 동시에 포도주와 기름을 몸에 지녔기 때문에 강도에게 매 맞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었다.

 

이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요한8,48절에도 한 무리의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라고 말한다. 곧 사마리아인과 귀신들린 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주님은 49절에서 나는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모욕한다.”고 말씀하셨다.

 

곧 유다인들은 그분을 사마리아인이요 귀신들린 자라고 말했지만, 주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들린 자가 아니라고말씀하셨다. 여기서 그분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 사마리아인은 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알렐루야!

 

요한복음은 예언적인 면에서 그분이 사마리아인임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이 사마리아인이 의도적으로 거의 죽어 누워있는 이 사람에게 와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포도주와 기름 이 두 가지로 구원하였다. 그분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것은 베들레헴의 측면이 아니라 골고다 이후, 오순절 이후의 측면에서 본 것이다! 포도주는 골고다의 구속의 역사이고, 기름은 부활의 날과 오순절 날의 역사이다. 곧 포도주는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한 주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기름은 주 예수님의 역사를 우리 위에 부어주는 성령을 말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상처 위에 그분의 영과 신성한 생명을 부어 우리의 깊은 속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기 원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만일 십자가가 없다면 하느님은 불의하게 우리 죄를 사하시는 것이 되고, 임의로 우리 죄를 처리하시는 것이 되며, 우리의 죄를 그냥 지나가시는 것이 된다. 또한 기름이 없다면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아들을 통하여 구속 사업을 이루었지만 그 역사는 우리에게 미칠 수 없고 여전히 우리는 상처 입고 죽음의 심판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된다!

 

기름은 포도주를 돕기 위한 것이다! 곧 한 면에서는 아담 안의 것들을 제거하고, 또 한 면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자기 노새에 태워,” 짐승은 사람이 스스로 걸을 필요가 없이, 그것이 사람을 어딘가로 데려다 준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그분께서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어디로 데리고 갔는가?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 여관은 하느님의 자비를 가리킨다! 이 사람이 하느님 앞에 나올 때 하느님은 그를 돌보셨다.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기서 두 데나리온을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에는 다섯 가지 금속이 언급되는 데, 금은 하느님의 성품과 생명과 영광과 의를 가리키고, 놋은 언제나 하느님의 심판을 말하며, 제단과 물두멍과 놋 뱀도 놋으로 만들어졌다. 철은 행정적인 권위를, 은은 시종일관 구속을 가리킨다!

 

여기서 두 데나리온은 은전이므로 구속을 의미하고, 은전 둘은 속죄의 가치를 증명하는 쌍방계약을 가리킨다! 은전 둘을 여관 주인에게 준 이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다! “여관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하늘에 속한 하느님의 집을, 물질적인 면에서는 교회를 가리킨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하는 일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주님에게 누가 자기의 이웃이냐고 물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신 후에 이 세 사람, 곧 사제(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셨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면, 주님의 말씀이 율법 교사에게, 율법 교사 그가 곧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 성경 구절을 읽을 때,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입시킨다!

 

오늘날의 교회는 거의가 당신에게 좋은 사마리아인이 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 예수님이 뜻하신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주님이 뜻하신 것은 당신이 바로 강도에게 매 맞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움직일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여기고, 자신에게는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을 도울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요 강도에게 매 맞은 사람이며,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며, 선한 행위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바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른 사람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먼저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당신이 구주, 곧 사마리아인을 사랑하면 영생이 있다고 말한다!

 

믿음의 문제에 있어 오늘날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사상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상처 나고 죽어가는 것을 볼 때,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 곧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주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의 도움을 받을 때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미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필요가 없다! 이 사마리아인은 원래 우리와 교통이 없었지만, 이제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위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주셨으며,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승천의 위치에 있게 하시며, 하느님으로 우리를 열납하게 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게 하신다!

 

그러므로 37절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말한다. 율법 교사는 바르게 대답하였다. 나를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인이 나의 이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당신을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인이 당신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을 혼돈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더러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너의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그분을 너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권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분으로 하여금 기름과 포도주를 당신의 상처에 부으시고, 당신을 짐승에 태워 여관(주막)에 데려가 돌보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분은 당신이 이것을 보기를 원하신다! 당신이 사마리아인처럼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실패는 항상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데 있다! 곧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구주가 되려고 하고 자기가 남을 구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구주로 세우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말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라는 데 있다! 당신의 생명은 상처받은 생명이기 때문에 당신은 사랑할 수가 없다!

 

사실상 당신의 실제 상태는 거의 죽어 있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하느님을 도울 수 없고, 사람을 도울 수도 없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결코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 또한 십자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도 당신에게 임할 수 없다! 오늘 루카복음 1025-37절의 말씀이 결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그보다 먼저 사마라아인이 자비를 베푼 후에야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분의 사랑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야 당신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 있기 전에는 우리는 누구도 결코 사랑할 수가 없다! 루카7,47절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죄를 많이 사함 받은 자는 저를 많이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사함 받은 후에 있다!

사랑이 많기 때문에 사함이 많은 것은 아니다. 이는 사함 받은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주님이 그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만일 내가 구원받은 것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사람들은 나의 사랑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됨을 볼 것이다!

 

나는 강도 만난 사람으로서 누워 있고, 아무 방법도 없으며,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지만, 주님께 나를 구원해 달라고 청할 수는 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후에야 나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때문이다(1요한4,10). 우리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낳은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은총이 가득한 한 주일이 되시기를!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어느 가톨릭평신도의 하느님 말씀 묵상'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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