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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1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16 조회수1,049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독서 미카 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복음 마태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사람들이 대부분 병원 가는 것을

꺼려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가기

싫은 병원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치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치아를 치료하면서 내는 날카로운

기계음은 정말로 듣기 싫습니다.

특히 이 소리는 공포영화 볼 때와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 줍니다. 저 역시

이 ‘소리’ 때문에 치과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치료 때문에 치과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다는 것을 아셔서

그런지, 의사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아프죠? 너무 아프면

 손을 드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참을만해서 가만히 있었지요.

 그런데 잠시 뒤에 “안 아파요?

아프면 손을 드세요.”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역시 참을만해서

가만히 있는데, 곧바로 다시

“안 아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아프지 않냐고 묻는

 의사 선생님께 “아프다.”고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들은 생각은 ‘아프다고

하면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치료하는 것인데...’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잠시 치료를 멈추고

 쉬는 시간을 주는 것뿐이지요.

치료 방법을 달리 할 것도 아니라면

그냥 참는 것이 더 낫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아프냐고 묻지 말고,

그냥 치료나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어요.’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의사 선생님의

 배려 섞인 이 말이 큰 위로가 될 수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 저를 향한 진정한 배려는

 말이 아니라 치료를

 빨리 끝내는 것뿐이지요.
배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나의 이웃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한 이 배려를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배려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상대방이

 원하는 배려를 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배려를 하면서 할 도리를

다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오셨지만,

정작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사람들의 심판이

두려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배척하는 그들에게 큰 벌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십니다.

즉, 그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 자리를 피하십니다.
진정한 배려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루어져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향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적대자까지도

배려할 수 있는 사랑,

이 사랑을 주님께서는 보여주셨고

우리 역시 그 사랑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이가 되며,

이런 이의 이름에 온 민족들이

희망을 걸게 될 것입니다.
나의 배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또 그 대상은 어떠했을까요?

소통의 비결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아서 쇼펜하우어)

전국성지전담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실천이 먼저입니다.

어제 전국성지전담사제회의를 마치고

갑곶성지에서 담당 주교님의 주례와

전국성지전담사제들이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미사 때에

주교님께서는 아주 재미있는

 말씀 하나를 해주시더군요.
어느 본당의 사목회장님께서

죽음을 맞이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는 아주 열심히 살았구나.

 따라서 하늘 나라에

빨리 갈 수 있도록

차를 한 대 주마.”하면서 최신형

SUV 차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이 사목회장님의

본당신부님께서 계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목회장님께서

 최신형 SUV차를 얻었으니

자신 역시 여기에 준하는 차를

얻겠지 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이 신부님을 보고서 베드로 사도는

“너도 아주 열심히 살았구나.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너에게도

차를 한 대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받은 차는

아주 조그마한 티코인 것입니다.

실망을 한 본당신부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왜 저는 티코입니까?”

라고 불만을 담아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명령만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사목회장은

직접 몸으로 실천했느니라.”
결국 본당신부님은 불편한

마음을 갖고 티코를 운전하면서

하늘 나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휴게소를 지나서부터는

너무 신나 보이는 것입니다.

노래도 부르고 함성도

 지르면서 운전을 합니다.

갑자기 바뀐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베드로 사도가 왜 불편했던

마음이 바뀌었냐고 묻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쎄, 저희 주교님께서

자전거를 타고 오십니다.”
사랑은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명령만 내리는 것으로는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명령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그 사랑이 가장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 나라로 가는 길에

무엇을 타고 가실 것 같습니까?

제 차 SUV인데...

하늘나라에서는 어떨까요? ㅋㅋㅋ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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