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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2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20 조회수1,343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6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독서 예레 1,1.4-10

1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들 가운데 하나인

힐키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7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9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복음 마태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살아오면서 창피함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것이 나를 가장 부끄럽고

당황스럽게 만들었을까요?
길을 가고 있는데 내 바지의

  지퍼가 열려 있음을

발견할 때는 어떨까요?

예전에는 많이 창피했었는데

이제는 뭐 그럴 수도 있다 싶습니다.

바지 지퍼를 환하게 내놓고

다니는 사람은 저 말고도

너무 많이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아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을 때 몹시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저 역시 배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이 역시 그렇게

창피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했던 성적보다 낮게

나와서 부끄러웠던 과거를

 떠올려봅니다. 이 역시 이제는

그렇게 창피하지 않습니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 공부 잘 못했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나만 잘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때 창피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신부가 되기 전까지

수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 근처만 가면 작아지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창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수영을 배워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수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배우면 그만인 것입니다.
어떤 생활이든 창피한 생활이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많은지요?

정말로 우리가 창피해야 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주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살아서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창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뒤에 어떠했습니까?

너무나 부끄러워서

도저히 자신 있게

자신들의 몸을 드러내놓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숨어 있으니 동산 나무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좋은 씨가 어떤 곳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길가,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 하나를 갖게 됩니다.

왜 농부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곳에 씨를

뿌리는가라는 의문이지요.

이런 어리석은 농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부분은 차별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악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구원의 길에서는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우리였을까요?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딘가

숨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 창피함을 극복해서

세상 밖으로 나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할 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야말로

 깨어서 사는 것이다.

(칼 구스타브 융)

창피해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좋은 생각’ 중에서)

조선시대에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도사가 있었다.

세 사람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중 도사를 찾아가 묻지요.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까요?”
도사는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빠졌다가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손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라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은 더 묻지 않고

길을 떠났다.

제자가 도사에게 물었다.
“한 손가락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 명 중에 한 명만

급제한다는 것입니까?”
“만약 그리된다면

그런 뜻이지.”
“그러면 두 명이 붙으면

 틀린 것이 아닙니까?”
“그때는 한 명이

떨어진다는 뜻이지.”
“만약 셋 다

급제하게 되면요?”
“하나도 빠짐없이

합격한다는 뜻이다.”
도사는 말했다.
“나쁜 점괘가 나오면

낙담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잘 된다고 말하면

경솔해 지는 법이지.

사실 점괘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무조건 맞는 점괘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도 이와 마

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굳이 이상한 것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함을

기억하면서

 스스로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기억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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