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2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21 조회수1,14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6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독서 예레 2,1-3.7-8.12-1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3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7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8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12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13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복음 마태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어느 대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혼자서 카메라를 보며 자기를

 스스로 소개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소개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단 10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를 소개한

 영상을 보고서 호감이 가는

사람을 고르는 실험이었지요.

과연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스스로 소개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당연히 생김새나

옷차림, 말투, 인상 등이 호감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바로

삶의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호감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10초라는 시간밖에 없어서

자신이 직접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 적이 없어도 말이지요.
그러면서 이 실험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삶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직접 표현을 한 적이

없더라도,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 실험의 결과를 보면서

가끔 내 자신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이 있나요?

 다른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과연 나는 책임감과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일에 대한 의욕이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성을 거슬러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으려고 합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합당한 자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은총을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에

끌리도록 만드셨지만, 이 본능을

 따르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청하지 않고,

하늘 나라를 맞아들일 준비를

갖추려 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의

잘못인 것입니다.
내 안의 삶의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만들어낸 삶의 의미가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사랑이 가득 담긴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면서

노력할 때 비로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시간을 쉽게 써버리는 사람은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찰스 다윈)

작년 이맘때 있었던 곳.

그런데 지금은 성지에만 붙어있습니다.

‘나’에 집중하라.

어렸을 때 친구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피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때 자신에게 강요했던

 친구들 때문에 30년째 담배를

끊지 못해 건강도

챙기지 못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정말로 제3자인

친구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년이 되어 있는 이 분은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도 학창시절처럼

 친구들이 강요해서 억지로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요?

이제 어디에서도

그런 압력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반대인 담배를

끊으라는 압력만 있습니다.
분명히 담배를 피우라는

 친구들의 강요에 의해 피우게

  되었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왜 담배를 끊으라는

많은 사람들의 강요의 말은

따르지 않을까요?
친구들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의지를 세워

행동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 누구 때문에

또 주변의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남을 탓하고

주변에서 원인을 찾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나’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닫힌 마음을 걷고 하늘과 같은

높고 넓은 마음을 간직하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