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2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23 조회수1,308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6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제1독서 예레 7,1-11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복음 마태 13,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저는 아침마다

아침운동으로 자전거를 탑니다.

제게 주어진 아침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코스로 자전거를 타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때로는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적은 시간에도

충분히 운동이 되는 코스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똑같은 길을 통해 똑같은 장면을

보면서 자전거를 탑니다.

며칠 전에도 자전거를 타고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지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맨날 똑같은 길이지만,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에 갈 때에는 새로운 것을

내 눈에 넣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자세히 둘러보면서 가보자.’
뻔한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도 보이고,

바닥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도 보입니다.

바다와 어울린 멋진 경관도

눈에 새롭게 보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오늘도 눈을 크게 뜨고

새로운 것을 보자.’라면서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나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번 역시 새로운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이렇게 매번

제 눈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꽤 재미있게 생긴 풀도 보였고,

 어제 보지 못했던 공도 하나

새롭게 생겼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500원짜리 동전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가 가는 매번 똑같은 길,

 그러나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나의 판단이 꼭 옳다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볼까요?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는 것도 다르고

판단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밀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지요. 그래서 종들은

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바로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두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기회를 주시는

판단을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빠르게

단죄하는 판단을 하곤 합니다.

오늘 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이

내일은 옳은 가르침을 듣고 진리를

 따를 수도 있는데, 단칼에 뽑아버리려는

성급한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심판 날에

하느님께서 판단하시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요?

매번 똑같은 길에서도 매번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특

별히 사람들에 대한 성급한 판단에서

시작되는 잘못된 심판은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맡길 때,

그 안에서 가장 공평하고

올바른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첫인상에 좌우되지 마라.

거짓은 늘 앞서 오는 법이고,

 진실은 뒤따르는 법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이제 곧 나올 제 책의 표지 시안입니다.

윷놀이

윷놀이에서

제일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자그마치 다섯 칸이나 갈 수 있는

 ‘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던질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 부족한 네 칸을

갈 수 있는 ‘윷’을 사용해서

이 게임의 이름이

 ‘윷놀이’라고 했을까요?

 ‘모놀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던지는 나무를 ‘윷’이라고 해서

 ‘윷놀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왜 이 나무를 ‘모’라고 하지 않고

‘윷’이라고 했을까 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어쩌면 빠른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던

선조들의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윷놀이에서 윷이나 모가

최고이지만, 때로는 ‘도, 개, 걸’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빽도’가 결정적인

한 방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좋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부는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

쓸데없어 보이는 것 역시

내 삶의 결정적 한 방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윷놀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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