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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의 기도는 성령을 부르는 기도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23 조회수2,47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연중 제17주일


<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잘 주시겠느냐! 
>


복음: 루카 11,1-13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안젤리코 작, (1450), 프레스코, 169x134 cm,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주님의 기도는 성령을 부르는 기도 >

 

요즘 부산행이라는 좀비영화가 흥행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흥행에 발맞춰 영화가 졸작이라는 비판적인 기사들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한 기사를 읽었는데 매우 이성적으로 부산행이 좋은 영화가 아님을 조목조목 짚었습니다. 이미 미국에서 마르고 닳도록 썼던 구태의연한 좀비들을 등장시켰고 CG 기술들도 이미 월드 워 Z’에서 썼던 것들을 모방하여 창조성이 하나도 없으며 배우들의 캐릭터나 연기력, 느닷없는 오버연기가 몰입을 방해하고 주인공의 눈물을 자아내는 연기는 제발 울어달라는 신파극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댓글은 오히려 이 글을 쓴 기자를 반박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사 아저씨 친구 없으시죠?”라는 댓글이 재미있었습니다. 개봉한 지 며칠 안 되어 벌써 300만이나 보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봐도 될 텐데 너무 안 좋게만 평가한 것에 그렇게 댓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까지 어두운 시각으로 비판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좋은 인간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받으셨고 권력과 부를 가진 몇몇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께 호감을 얻는 사람은 대다수에게도 호감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매력인 성령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당신이 머무시기에 합당한 사람에게만 머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는 이 기도를 통해 성령이 충만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셨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것이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고 그 기도를 밤에 찾아가 끈질기게 빵을 청하는 사람처럼 쉼 없이 되풀이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소중한 성령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주시는 성령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어떻게 성령을 청하는 기도인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 하느님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십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다는 뜻은 죄 있는 땅에는 머무시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같이 깨끗하지 않다면 그 안에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아버지’ -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게 하시기 위해 하신 것은 그분의 뜻에 순명하여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내가 가진 성령을 도로 바쳐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바오로 사도는 하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마치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평화와 기쁨이 가득차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성령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기 전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가 종으로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아멘!’ 하는 것도 종으로서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서약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음식을 먹고 생활하다보면 다시 배가고프고 그러면 다시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며 등잔을 켜고 있을 때 타는 기름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그리고 규칙적인 기도로 우리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무기력해지고 걱정이 많아지고 두려움이 커지며 미움이 자라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성령은 곧 생명이고 생명은 곧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너희와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다”(마태 226,27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힘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힘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교만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 중에는 절제도 있습니다. 유혹 거리에 가까이 가지 않고 유혹이 있을 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그 유혹을 이기시기 위해 세례 때 성령을 먼저 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 성령께서 작용하시지 않으면 주님께 용서를 빌 힘도 사라집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졌던 베드로는 성령의 힘으로 다시 건져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고해소에 다시 나오게 하는 것도 내 안에 남아계신 성령의 힘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 자체가 성령을 부르는 기도이고 그런 마음으로 성령이 충만해질 때까지 청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성령을 원하는 사람이 아님이 증명되는 기도입니다.

 

성령은 성경에서 숫자 ‘50’으로 상징됩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체, 즉 성령을 주시는 상징인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오십 명씩 앉혔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소돔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표현은, 우리 안의 모든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이고, 하느님의 성령이신 분이 내 안에 살아계시면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멸망에서 구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찌 성령 청원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산행이란 좀비 영화는 사실 감독이 어린이의 눈으로 참으로 좀비 같은 무서운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 살기 위해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임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짜 좀비들은, 그러니까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은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릴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또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실상은 좀비들과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좀비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이신 성령님을 청하는 주님의 기도를 시도 때도 없이 바치고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성령을 원하는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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