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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눈먼 자들의 도시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7-31 조회수1,10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연중 제18주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복음: 루카 12,13-21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주제 사마라구가 만약에 세상 사람 모두가 눈이 멀어 단 한 명만이 볼 수 있다면이란 발상으로 쓴 장편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란 책.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한 회사원으로부터 시작된 갑자기 앞에 보이지 않는 증세. 그리고 그와 접촉했던 모든 이들이 눈이 멀어갑니다. 그런데 그 회사원을 진료했던 의사의 아내만은 눈이 멀지 않습니다. 나라에서는 눈이 멀어가는 것이 전염병인 것으로 결정하고 눈이 멀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격리시킵니다. 의사의 아내는 자신도 눈이 먼 척 하며 남편을 지키기 위해 수용소로 함께 들어갑니다.

수용소는 실로 아수라장 그 자체입니다. 아무데나 배설을 하고 갖은 범죄행위를 자행합니다. 그 중에서도 처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던 이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폭력배들입니다. 그들은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배급되는 식량을 갈취하고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이미 그렇게 사는 것이 익숙해 있기 때문에 갑자기 눈이 멀어서 들어온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눈이 보이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역시 피해를 봐야 했던 여 주인공. 그러나 그녀는 몇몇 사람들을 이끌고 그 조직과 싸워 자신의 편에 선 사람들을 구해냅니다. 그녀의 마음엔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목적 외에는 그 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협조했다면 그 세상에서 왕 노릇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소굴 자체가 지옥인데 어찌 왕 노릇 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겠습니까.그들을 구출하여 밖으로 나왔으나 온 세상이 눈이 멀어 무법천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유일하게 눈이 보였던 그 여자 주인공의 눈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이 조금씩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소설도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 구원의 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에겐 원하면 이룰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있었으나, 이 세상에서 권력을 조금 쥐고 있거나 음식을 더 많이 챙기려 하는 등의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님들은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 세상에서 권력과 쾌락, 돈 등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이 사람은 공정을 바로잡아 달라는 합당한 청을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형이 상속을 모두 가로채고 자신은 빈털터리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은 장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야단칩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돈이 있건 없건, 건강하건 그렇지 못하건, 권력이 있건 없건, 그런 것들엔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가 지옥임을 알고 계시고 지옥에서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쾌락을 즐기기를, 권력을 가지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탈출시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녀를 대학 붙여 달라, 취직시켜 달라, 건강 회복시켜 달라, 결혼시켜 달라고 청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하늘나라보다는 이 세상을 좋아하고 있는 장님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서 비유로 오늘 죽을 사람이 재산을 모으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를 예로 들어주십니다. 우리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이어야지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받고 아버지의 축복을 모조리 받았고 에사우는 동생을 섬기는 거의 저주의 삶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에사우의 자손들은 번성하고 족장들도 수없이 나오고 왕들도 많이 나옵니다. 야곱은 형이 사백 명의 사람을 이끌고 자신에게 나올 때 형에게 일곱 번이나 엎드려서 용서를 청해야 했고, 야곱의 대를 잇는 요셉은 이집트에 종살이하러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 에사우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서 강성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일까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저주이고 이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머물기 원하고 가난한 자는 저 세상을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니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시겠습니까?

 

요즘 참 좋은 영화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우리들이란 영화입니다. 두 왕따 여자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아니는 집이 가난해서, 한 아이는 부자지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서로 위로 할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부모님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한 아이는 화가 납니다. 그래서 돈 자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해 주는 것이 가난한 아이의 남동생과의 대화에서입니다.

가난한 왕따 여자 아이의 동생도 친구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있다면 덩치가 큰 아이인데 항상 그 친구에게 맞으면서도 다른 친구가 없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느 날 또 얼굴에 멍이 들어 왔습니다. 항상 맞고 다니는 동생을 나무라는 누나에게 오늘은 내가 먼저 때렸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근데 눈은 왜 그래?”

그 애가 일어나서 때렸어.”

그리고?”

놀았어.”

바보야, 너도 때렸어야지.”

그럼 언제 놀아!”

 

아이들은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누군가로부터 화살을 맞았다면 누가 자기에게 화살을 쏘았는지부터 찾습니다. 화살을 빼내고 퍼져가는 독을 빼내야하는데도 여전히 세상 논리 속에 머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치고 박고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형이 가로챈 유산을 자기에게도 나누게 해 달라는 청은 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서 끌고 나가시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하느님은 금송아지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영화를 위해 부려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 것을 안다면 그 배를 꼭 쥐고 있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배에서 더 좋은 방을 차지하려고 안절부절 하며 도움을 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원하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예수님께 무언가를 청하고 있다면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돈, 두 주인 중 한 주인만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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