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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8.0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01 조회수1,258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6년 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예레 28,1-17

1 유다 임금 치드키야의

통치 초기 제사년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이며

아쭈르의 아들인 하난야가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3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곳에서

가져가 바빌론으로 옮겨 놓은

주님의 집 모든 기물을,

내가 이곳에 다시 돌려 놓겠다.
4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아들

여콘야와 유다의 모든 유배자를

이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정녕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겠다.’”
5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제들과, 주님의 집 안에 서 있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6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였다.

“아무렴,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주님께서 당신이 예언한 말을

실현시키시어, 주님의 집

모든 기물과 모든 유배자를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오.
7 그러나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전하는

이 말씀을 들어 보시오.

8 예로부터, 나와 당신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들에게 전쟁과 재앙과

흑사병이 닥치리라고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
10 그러자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내어 부수었다.

 11 그러고 나서 하난야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길을 떠났다.

12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순 뒤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가서 하난야에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

 14 참으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우고,

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나는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복음 마태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

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오랫동안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분들을 만나면

열이면 열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미사에 참석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일이 바쁘면 당연히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이러한 상황을 한 번 상상하게 됩니다.

서로 사귀고 있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한동안 연락을 끊고서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해, 일 때문에 너무 바빴어.”
이러면 어떨까요?

과연 이 연인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길까요?

연락을 전혀 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뜻일 것입니다.
“미안해. 당신보다

 일이 더 중요해서

 당신한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이런 뜻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미안해.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랑이

식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만남을

계속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저 막연한 의무감만을 가지고서

주님을 가끔 만날 뿐입니다.
사랑은 만남이 아닐까요?

 만나지 않으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주님 역시 계속 만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멀어져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만나려고 노력하다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큰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도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수가

자그마치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저도 각종 행사를 해봐서 잘 아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이라면 정말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것도 교통이 불편하고

각종 방송장비도 없는 시절에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특별한 표징을 보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에 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행적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사랑은 어렵고 힘든

지금의 삶을 모두 이겨내고도

 남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쫓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잊어버리는 순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으며,

어렵고 힘든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기쁨은 절망의

 절벽에서도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

(앤 모르 린드버그)

오병이어

매력

1924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엔드류 어빙과 함께

정상 600미터 아래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원정을

떠나기 전,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부인이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며

죽을 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가?”
그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Because it is there.”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
바로 정상이 있기 때문에

도전 의욕을 갖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산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바다를 떠올려봅니다.

바다는 반대로

정상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의 매력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여름 피서 철을 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어제 뉴스를 보니 부산의

 해운대는 ‘물 반, 사람 반’

이었다고 합니다.

바다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산과 달리 정상이 없어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상이 있는 것도 매력,

없는 것도 매력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이런 매력적인 곳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매력은

어떤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매력도 커지지 않을까요?

그런 주님을 쫓는 우리,

그 과정 안에서 분명

우리의 매력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시나이산 정상에서의 일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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