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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8.1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12 조회수2,082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6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제 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복음 마태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버스 기사입니다.

첫 정류장에서 다섯 명이 탔고,

그 다음에는 차례로 6명 탔습니다.

그 다음 정류장에서 이번에는

2명이 타고 1명이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 버스 기사의

나이는 몇 살일까요?”
어떻게 알 수가 있냐고요?

그런데 처음에 제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십니까? 맞습니다.

 ‘당신은 지금 버스 기사입니다.’

라고 시작을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버스 기사의 나이는

바로 여러분의

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버스 기사의

나이를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처음에 했던 말을 듣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렇게 기억하지 못하는 말로
 인해서

안 좋은 사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입니다.

결혼 전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사랑하니 예뻐 보이고

멋있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이 사랑한다는 말을 잊어버립니다.

 대신 상대방의

사랑하기 힘든 부분만 보이고,

그 부분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너무 게을러.’,

‘결혼하니 변했어.’,

‘저 잔소리 들으려고 내

가 결혼한 것이 아닌데...’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이유는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잘못에 있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든 둘 다 책임이

있다는 경우이지요.

그중 첫째는 사랑한다는 말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 대신에 하는 부정적이고

아픔을 주는 많은 말들로 인해서

어렵고 힘든

결혼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아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당시에는

여자가 남자 없이 혼자 살기란

쉽지 않은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버려지는 순간 그 여인은

큰 아픔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것이고,

 버리라고 말씀하시면 사랑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신 분이 어떻게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냐고

따질 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첫 번째 사건인 인간

창조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지요.

 하느님께서 아담이 아내를 내쫓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셨다면,

 한 남자와 여러 여자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고,

여자를 창조하신 방식과

계명의 형태를 통해,

 남자는 계속 한 여자와

살아야 하며 결코 둘은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부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성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이가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성실한 관계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잊어버리기에 성실한 관계어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참, 저는 오늘부터

 8월 15일까지 수원신학교

개강피정 지도를 합니다.

따라서 갑곶성지에서

저를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새벽 묵상 글은

계속 올라갑니다.

신학생들과 저에게

좋은 피정이 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즐거웠던 기억들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은

사회에 돌려주라.

(워렛버핏)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충고하지 말자.

어렸을 때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그리 잘 듣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에 집중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은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리 나아지지 않았지요.

 신학생답게 기도생활에

충실하기보다는 순간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충고는

이쪽 귀로 듣고는 저쪽 귀로

흘려버리곤 했습니다.

답답하고 꽉 막혀 있는

사람보다는 세상에도 열려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세상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던지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부모님께서 걱정을

 참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저런 모습으로 과연 신부님이

 수 있을까 싶으셨겠지요.
어렸을 때의

제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족했던 나였는데

지금 조금 나아졌다고

다른 사람에게 충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충고 자체가

 부정적인 생각을

끌어내는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해 어떤 지적을

받게 되면 청개구리처럼

무조건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듣기 싫은 충고를

다른 사람은 좋아할까요?

역시 충고라는 것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싶습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 때문에 충고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내가 듣기 싫은

충고를 그 누가 듣고 싶겠습니까?

더군다나 나 역시 부족함

그 자체가 아닙니까?

 결국 상대방이 틀렸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다를 뿐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청개구리와 같은 삶에서 벗어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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