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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탄 것과 타지 않은 것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13 조회수1,466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연중 제20주일


<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

복음: 루카 12,49-53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카라바죠(Caravaggio) 작, (1606), 제노바 롯소궁전

 

 

금관의 예수시인 김지하가 1970년대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 다니며 유신의 참혹한 현실에 스스로 눈을 감고 있었던 교회와 성직자들을 질타하는 내용으로 쓴 희곡입니다.

이야기 줄거리는 빈민촌 사창가의 집이 헐리는데, 이 추운겨울에 갈데없는 창녀들을 위해서 철거반대 데모에 앞장서라고 수녀가 신부에게 종용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하지만 신부는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철거반대운동을 회피합니다. 또 추운겨울 새벽 문둥병자와 거지가 시멘트로 만들어진 예수의 상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가운데로 신부와 호화로운 교회건축을 담당한 사장이 지나갑니다. 거지와 문둥병자는 신부를 향해 예수를 팔아먹고 사는 예수쟁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경찰을 본 거지와 문둥병자는 허겁지겁 도망을 갑니다. 경찰은 그들에게 행인들에게서 뜯어낸 돈의 일부를 상납하라고 거지와 문둥병자를 협박하다가 사장을 보고 그를 급하게 따라간다. 마지막에 등장한 창녀는 문둥병자와 거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이기 위해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금관의 예수상이 있는 광장에서 문둥병자는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육중한 예수의 상을 바라보며, 신세타령을 합니다. 그러다가 예수의 상 앞에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이 때 문둥병자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빗물인가 했더니, 시멘트 예수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흡니다. 그 때 문둥병자는 예수 상 머리에 씌워진 금관을 발견하고, 금관을 벗겨 가지고 좋아합니다. 이 때 예수의 입이 열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문둥병자를 향해 그 금관은 너의 것이니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너무 오랜 세월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적적한 시멘트 감옥 속에서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너희들이 불행 속에 네가 불꽃으로 타오를 날을 희망하며 왔다고 외치십니다. 그리고 거지와 함께 거리로 나가 부랑자들과 생활하십니다.

이에 불안과 불만을 느낀 부자와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머리에 금관을 씌우자 다시 움직이거나 말하지 못하고 교회 앞에 동상으로 서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셨는데 인간이 그 가시관을 벗기고 금관을 씌워 예수님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합니다. 불은 성령님을 상징하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물과 피입니다. 그런데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함은 본래 세상은 불과 상관없이 살아왔음을 말합니다. 그런 세상에 불을 지르니 이제 세상은 불에 탔거나 타고 있는 것, 그리고 타지 않은 것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불에 탄 것은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재로 여겨지게 되고 불에 타지 않은 것은 여전히 세상에 유용한 것으로 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이들은 그 불로 타버려서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전재용 선장은 매우 잘 나가는 원양어선의 젊은 선장이었지만, 성령의 불에 타버려서 베트남 보트피플 난민 96명을 구해주고는 멍게 양식자로 생계를 꾸려야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물론 불로 가장 먼저 타버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세상의 적이 되셨습니다. 결국 가난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시다가 가장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반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저도 경영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다가 사제가 되고나니 주식이나 펀드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학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대화를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서 성령께서 조금이나마 저를 태우고 계심을 느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령의 불로 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두 부류 중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불에 타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가 금관을 쓰고 살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저 금관을 쓰고 계신 커다란 동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가시관을 쓰시며 성령의 피를 쏟아내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람들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루살렘은 곧 망할 것이니 대비하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셨습니다. 거지와 창녀들과 문둥병자들과 어울리시며 돈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의 적이 되셨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이들의 힘을 빼셨습니다. 그러니 죽임을 당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우물에 빠진 예레미야는 다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시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성령의 불에 타버린 이들 속에 부활의 생명력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하여 돌아다니며 철근이나 구리 등을 주워서 고물상에 판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집이 허물어지거나 전선이 불에 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 안의 참된 보석은 우리 자신이 타버릴 때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금관을 쓰시고 콘트리트 안에 갇혀 계실 때가 아니라, 벌거벗겨지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실 때 비로소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성혈의 불로 우리를 태우려고 하시는 이유가 그렇게 세상에서 다 타버린 쓸모없는 것이 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의 보석이 영원히 묻혀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이 받아야하는 세례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 짓눌림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은 우리를 또한 그 십자가의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결정이 남았습니다. 그 불에 타서 세상의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이 세상의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금관을 씌워가며 금송아지로 만들어 갈 것인지.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도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난해지고 헐벗고 멸시받고 고통 속에 울게 된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닮았다고 하시며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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