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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거드름만 부린다! (마태23,1-12)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21 조회수1,52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820/주일복음말씀묵상()/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거드름만 부린다! (마태23,1-12)

 

 

<오는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그들은 모세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책과 권위를 가졌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위는 모세처럼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성직자들은 모세의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를 높여 왔으나, 이는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이제 성직 권위주의는 허상임이 드러나고 있다! 오랫동안의 성직자 중심주의의 폐해는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의 기능을 말살해버렸다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의 실상을 보라! 그들의 실체는 여기보다 더욱 더 빗나가 버렸다! 하느님의 말씀도 바르게 강론하지 못하는 무자격의 성직자들이 상당수이다! 그들의 행실은 권위주의적이며 교만하다. 특별히 그들 중 상당수는 말씀을 왜곡하고 인간의 이념과 자기신념의 인본주의에 빠져 교회를 갈등과 분열로 파탄 내어 버렸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그들은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정체를 광명의 천사인양 교묘히 숨겨왔으나 오늘날 그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해방신학을 신봉하는 이단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교들을 포함하여 거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이단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수십 년 간, 신학교 때부터 배우고 들은 것이 위조품이고, 그 배우고 들은 위조품을 사회와 교회에 주입시키려는 가라지들이다! 오늘날 그들의 지속적인 반정부적 정치적 행위와 그간의 말들과 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정체가 가라지들임을 스스로 밝히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성당에서 제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강론하는 영적인 신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이 시대 영적인 신부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핍박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시대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의미 있는 손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마태23,1-2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인의 역사에 의하면, 모세시대 이후로 유다인들은 악한 왕들, 포로 됨, 파멸, 흩어짐 등의 지독한 고난을 겼었다! 자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모르게 되었으며 더 이상 준수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런 상태의 유다인들을 원래의 율법으로 다시 인도하기 위하여 열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라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조상들이었다. 처음에 이들은 율법을 집행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진실 되게 모세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대가 흘러 예수의 시대가 되었을 때 이름만 남았을 뿐 실제가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명목상으로 그들이 여전히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23,3절은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온 율법을 행하고 지켜라.”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했다. 주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율법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님은 유다인들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이 구절에서의 원칙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있다. (1)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 사람이 구원받은 후, 그는 은총의 계명 외에 다른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2)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고자 한다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 전자가 옳은 의견이다. 로마서의 주요 중심에 의하면, 죄인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갈라티아서에 의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거룩하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은 칭의(稱義)와 거룩은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로마서 7장의 가르침은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구원받은 사람이 간음을 행하는 자임을 보여준다! 만일 그가 여전히 율법을 지킨다면 율법은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음행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많은 교리 중에서 이 원칙이 혼돈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구원의 확신이 없다!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주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분은 이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셨다!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이는 완전히 주님과 반대된다. 주님은 말과 일에 능하셨다”(루카24,19).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도 말 할 수 있으나 행할 수는 없다!

 

4절은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는 율법에 근거하여 기존의 율법 외에 더 많은 율법을 만들었고 그것들을 사람의 어깨 위에 묶어 두었으나 그들 스스로는 율법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그들은(바리사이와 율법학자) (1)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자는 벌을 받으나 그들이 추가한 율법을 범하는 자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정하였다. (2) 점차 두 가지 율법은 똑같이 중요하게 되어 두 가지 율법을 범하는 자 모두 똑같이 형벌을 받게 되었고, (3) 나중에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였으며 심하게 벌을 받아야 하는 자는 그들의 율법을 범한 자였다.

 

이 의미는 그들은 그들이 율법의 세칙으로 추가로 만든 율법의 규례와 규칙들이 모세의 율법의 정수로 생각했고, 그러므로 그들의 율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태7,11-13절의 고르반이 한 예이다. 오늘날의 헌장들(cgaoters), 신조들(creeds), 신경들(beliefs) 등이 똑같은 원칙에 속한다. 그들은 율법 중에서 쉬운 것들을 지켰다. 그들은 그들이 지킬 수 없는 것들을 다시 유대인들에게 지키라고 명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똑같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계명들 중에 쉬운 것들을 취하여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되게 하며, 어려운 것들(마태5-7장과 같은 것들)은 유다인이나 혹은 하늘나라를 위한 것이 되게 한다. 그것은 그들이 바리사이들로부터 배운 것일 것이다.

 

5절은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경문)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늘인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주님은 그들의 참된 상태와 실제의 모습을 드러내셨으며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셨다.

 

자칫 헌금과 설교는 그들의 열심과 영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자들의 가면에 불과하다! “성구갑”(경문)은 유대인들이 율법서의 네 부분이 들어있는 조그만 통으로 끈을 달아 팔에 일곱 번 돌려 묶었다(신명6,8; 11,18). “옷자락 술은 청색과 석류문양을 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더 넓게 하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면서 자신의 거룩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6-7절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이는 언제나 남의 앞에 서야하는 위치와 습관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앞에서의 교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랍비)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하다! 속에 든 것은 없어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선생들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그들의 목표와 의도를 분명히 보기를 원하신다. 많은 때 우리는 매우 열심히 있으며 많은 선한 일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의 목표와 의도는 무엇인가?

 

8절은 그러나 너희는 스승(랍비)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여기서 화제를 바꾸셨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랍비)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모든 믿는 이들은 땅에서 동등하며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높을 수 없다!

 

교회의 사제나 목사라는 용어는 스승(랍비)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성경에 의하면 장로들이나 집사들은 단지 봉사의 목적을 위하여 임명된다. 그 외에는 계급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직자 계급이나 성직자 지위를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바리사이인들의 위치로 떨어졌다! 인간의 편의와 그들의 조직을 우선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직위를 만들었을 뿐 사제도 목사도 주교도 추기경도 교황도 성경에는 없다!

 

9절은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가정에서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부들이나 목사와 같이 권위적 위치에 있는 자로써 교회 내에서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그 다음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은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2세기에 교회 내에 교부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실지로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많은 지역에서 늘어나는 교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계급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절은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뿐이시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선생이란 종교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선생이라고 불리는 것은 큰일이며, 그러한 칭호를 결코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도록 정하셨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그 길을 제시하시고 먼저 앞서 가시면서 따라오기를 원하신다. 따라가는 양들은 모두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에 도달하고 편히 쉴 것이다(시편23,1-3).

 

11절은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주님께서 이 문제를 두 번째 언급한 것이다(마태20,26-27). 여기서의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참으로 크게 되는 것은 명성이나 지위나 칭호에 달려 있지 않으며, 단지 신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봉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2절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다! 스스로 낮추는 것은 자신이 솔선하여 낮추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의하여 멸시받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자신 안에 헛된 영광이 없어야 한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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