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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22 조회수1,70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821/주일복음말씀묵상/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루카13,22-30; 마태7,6-14; 8,11-12)

 

 

루카13,22-23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하고 물었다”(원문 참조).

 

이 단락에서는 심판 때의 구원의 기회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완성으로 접근하는 기회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25-30절에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늘의 잔치에 대한 상징을 거듭해서 끌어들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하고 물었다.”

이 물음은 이론적인 물음이며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24절에서 대답을 얻는다. 이것은 실천적인 대답이며, 묻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며 그의 단호한 행동을 촉구하는 대답이다. 그 대답은 마태7,13-14절과 일치한다.

 

13,24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복음은 보다 구체적이다. 이 두 구절을 함께 연결하여 묵상해 보자!

마태7,13-14절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은 하느님 나라(천국)의 원칙의 문이다! “좁은 문은 천국의 문이다! 이 좁은 문은 앞 구절에서 제시된 새로운 율법(마태5-7장의 산상설교)을 가리킨다. “들어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나, 그 길을 걷는 것은 실행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은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며, 그 길을 걷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좁은 것은 주님의 명령의 엄격함을 상징한다! “좁은은 비교적인 용어이다!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율법이 좁은 문이므로 거기에는 또 다른 법, 곧 더 넓거나 혹은 더 관대한 법이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산상설교의 요구가 모세의 율법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 두 문과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내적인 상태에 따른 것이며, 또 하나는 밖의 외양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문들 중 하나에 들어가거나, 두 길 중 하나를 걷기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오늘 우리 생활의 원칙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좁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고서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갈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마태오복음 5-7장에 언급된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왜 그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산상설교에서 제시된 길은 힘든 길이지만,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서 이 길을 걸으라고 부르신다!

 

비록 거기에 외형적인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도덕성이나 윤리에 대한 요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넓은 문이요 넓은 길이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한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나 좁고 협착하므로 그 길은 단지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며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수용한다. 육신의 세상과 혹은 오늘날의 세상의 영광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없다!

좁은이라는 그리스어 낱말은 환난이라고 번역되는 낱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 길은 종말적 환난이 가득 찬 길이다(마태5,10-12)!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문으로 인도한다! 이 길은 폭이 아주 좁다. 십자가의 그늘 - 그리고 빛 - 이 생명에 이르는 이 길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이것은 진리가 일반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좁은 문과 좁고 협착한 길을 찾을 필요가 있음은 그러한 것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의()에 이르는 명확한 길을 제시하셨다! 그분이 요구하신 의(5,20)는 큰 문과 넓은 길을 통해 오지 않는다. 그것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통해서 온다!

 

여기서 예수님은 큰 문과 넓은 길을 바리사이들의 외적 의()에 견주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외적 요건이 아니라, 내적 변화를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킨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을 찾는 이의 수가 매우 적을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25-27절에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보여준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이들은 주님 가까이에서 같이 먹고 마신 유다인들을 가리키며 유다인들이 행하고 있던 것은 악행이었음을 암시한다!

 

주님께서 그들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에서 불의(불법)라는 이 단어는 지나쳐 나아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은 2테살1,9절에서 언급된 그 영광과 또 다른 영광 안에 그들의 분깃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일반적인 요구 조건은 구원받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믿는 이의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사람을 통제하신다! 그러나 사람 위에 부어진 성령은 그 사람에게 순종한다. 이것이 1코린14,32절은 선지자들의 영이 선지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곧 말씀을 주신 분은 성령이지만 어떻게 말하고 언제 말하는가는 선지자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성령은 다만 구원받은 사람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위에도 임하는데 예를 들면 구약의 발람과 사울왕의 경우가 그러하다. 신약에서도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하며 능력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불법을 행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죄로부터 건져냄을 받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을 쫓아 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자기 신념대로 행하는 모든 일은 주님 앞에서는 불의한 것이다! 영을 쫓아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믿는 이들을 그 의미조차 모르고 있다!

<이의 이해를 위하여 http://cafe.daum.net/yoondaniel 영적 성장과 영적인 사람을 독서하실 것!>

 

28절에서 주님은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동일한 내용인 마태8,11-12절에 의하면, 이방인 백부장의 큰 믿음을 보시고, 백부장의 그분에 대한 평가와 전적인 신뢰를 예수님은 믿음(마태8,10)이라고 부르신다!

 

믿음이 이렇게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가로 놓인 분리의 벽은 순간적으로 이미 극복되며 치유와 구원이 그 이방인(비유대인)에게도 역시 수여된다(마태10,13). 특히 마태오의 눈에 이 사건은 계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이방 민족들에게 주는 예수님의 약속을 덧붙인다!

 

이방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이 약속은 이스라엘에게는 경고의 말씀으로 작용한다.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여기서 우는 것은 후회를, 이를 가는 것은 자기 책망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은 장래, 곧 천년왕국을 가리킨다. 천년왕국 동안 많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나라 밖으로 쫓겨나날 것이다.

 

29-30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도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방인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한 상에 앉을 것이다. 이것은 왕국 시대, 곧 천년왕국에서 발생할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은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구원받은 유다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보다 먼저 구주를 영접하여 천년 왕국에서 하느님의 왕국에 참예할 것이다!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은 이방의 믿는 이들보다 뒤에 주님을 믿을 유다인들을 가리킨다(로마11,25-26). 그러나 이 구절의 말씀은 마태19,30절과, 20,16, 마르10,31절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적용된다.

알렐루야!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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