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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탈렌트의 비유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28 조회수2,53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827/주일복음말씀묵상/ 탈렌트의 비유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마태25,14-30)

 

 

탈렌트의 비유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반면, 열 처녀의 비유는 성령으로 충만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기름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탈렌트는 주님을 위한 것이다. 기름은 생활을 위한 것이며, 은사는 사역을 위한 것이다! 기름을 갖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될 때에만 은사를 최대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기름없이 탈렌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가 성경에 먼저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합당한 생활과 함께 합당한 사역을 가질 수 있기 위하여 우리는 기름과 탈렌트 둘 다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의 탈렌트의 분배>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1)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와 (2)주님과 우리의 관계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분명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많은 모순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자녀들이며, 주님 앞에서 우리는 종(노예)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는 자녀들이며, 일로는 종들이다. 은총 안에서 우리는 자녀들이며, 책임에 있어서 우리는 종들이다. 우리는 아들로 인하여 자녀들이며, 그 영, 곧 성령으로 인하여 종들이다!

 

오늘 본문은 종들과 주님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자녀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태25,14절부터는 더 이상 영원한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구원 및 영원과 관계된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 끝까지 지속될 그분과 그분의 종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천년왕국은 마태오복음 연구와 요한묵시록 연구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주님과 아들과의 관계는 승리와 보상과 관계된다! 탈렌트의 비유는 보상과 관련되며, 영원과 관련되지 않는다! 영원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신약과 구약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 그 생명이 오기까지 천사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임받는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우리가 먼저 생명을 소유하며, 그런 다음 일한다. 바로 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으로 인하여 일한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거듭나야 하며, 그런 다음 영을 쫓아 행하는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의 육체의 봉사를 원하지 않으시고 영을 좇아 행하는 봉사를 갈망하신다!

 

마태25,14절은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원문 참조)고 말한다. 원문에는 하늘나라라는 말이 없다. 어떤 사람이 것과 같다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인이시다! “타국으로라는 용어는 이 세상에 있지 않으며, 우리의 시민권은 그 나라에 속한다(필리3,20).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는 주님의 승천을 의미한다(히브9,24; 1베드3,22). “종들을 불러이 종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날의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기 재산을 맡김은 주인을 위하여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기를 기대했음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상황도 동일하다! 우리는 그분의 소유를 우리에게 맡기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긴다!

 

이곳의 말씀은 루카19,13절의 내가 오기까지 장사하라는 비유와는 다르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해야 할 것을 특별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추구하고 그것을 달성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뜻을 분별하며 달성할 수 있는 자들만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실질적인 시험은 종들이 해야 할 어떤 일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다!

 

15절은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탈렌트는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키지 타고난 사람의 능력이 아니다! 주님은 세 명의 종들만을 언급하셨다. “은 모든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이 세 종들은 세 부류의 종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단지 세 명의 종들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은 항상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다. 모두가 적어도 한 탈렌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은사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만일 은사가 없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다! 모든 믿는 이들이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자는 그 날 주님 앞에서 회계()해야 할 것이다! 능력은 탈렌트가 아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과 은사가 모두 하느님에 의하여 정해진다. 주님 자신이 그분의 소유를 종들에게 그분 자신이 맡기셨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대신하여 이일을 하도록 다른 사람을 임명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부나 목사를 정하거나 신학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부나 목사나 신학은 은사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직 위임식을 통하여 주님을 대신하여 소유를 맡기기를 좋아한다. 다 많은 탈렌트를 갖고 있다고 해서 더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탈렌트를 받은 자와 다섯 탈렌트를 받은 자에 대한 보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종들이 탈렌트를 사용하는 방법>

16-18절의 비유의 목적은 우리의 주의를 세 번째 종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한 탈렌트를 받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한 탈렌트를 받는 자들은 게으르거나 나태하게 되고, 탈렌트를 매장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땅은 세상을 상징하므로 땅을 파고는 세상과 연관되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노예에 대한 심판>

19-23절은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오랜은 교회 시대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이천년 이상 계속되어 왔다. 기간을 오래 끌 때, 주님의 위임을 잊어버리고 첫 사랑을 잃어버리기 쉽다!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회계)하게 되었다.”이는 주님의 재림을 확실하게 말한다!

 

오늘날 교회들의 실패는 주님이 오셔서 그들과 계산하실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부터 우리가 한 것이든 하지 않은 것이든 다시 계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은 구원에 관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1코린3,10-15)과 우리의 말, 우리의 생각 과 행위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로마14,12).

 

<세 번째 종에 대한 심판>

24-25절은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굳은)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

 

한 탈렌트를 받은 자는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지 않았는가? 틀림없이 그는 구원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주님 자신의 종으로 불리웠으며, 그러므로 그분의 피에 의하여 구속받았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자를 그분의 종이 되도록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의 감추인 의도를 들어내고자 하신다!

 

굳은은 엄격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주님과 그분의 은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는 주님이 너무 엄격하며 그 자신이 여전히 구약의 시나이(시내) 산 아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은총의 시대 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성공이나 실패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시지만, 우리는 충성스러운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26-27절은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 주님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신다면, 이미 심은 것과 뿌린 것은 어떠한가? 주님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는 논의할 근거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종의 게으름 때문이었다! 게으른 사람은 보상을 받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믿는 이들은 잘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라는 말은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장사하는 것은 바로 더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은사를 받았으나 그것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려고 했어야 했을 것이다. 왜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거나 단 한 사람이라도 도와주거나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우리 일의 성공에 대하여는 책임이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도록 돕지 않았다면 애석한 일이다! 우리는 적어도 한 사람은 구원해야 한다!

 

28절은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라고 말한다. 세 번째 종은 두 가지 벌, 곧 탈렌트를 빼앗기는 것과 내어 쫓기는 것을 받았다. 충성된 종들은 두 가지 보상, 곧 기쁨과 권위를 받았다!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이것은 우리 주님이 굳은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위하여 한 탈렌트도 남겨 놓지 않고, 열 탈렌트 가진 자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29절은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원칙이다! “가진”,“가진 것이 없는것은, 오늘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있는 자는 장래의 증가와 심지어 풍성을 체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더 나아가 심지어 더 많은 일들을 돌볼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늘나라에서는 은사를 발휘할 기회가 더 많이 있다. 그러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자는 그가 가진 은사를 빼앗길 것이다.

 

30절은 그리고 그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깥 어두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바깥 어두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이것을 언제 말씀하시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시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기 위하여 공중으로 끌어올려질 때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깥 어두움은 공중의 바깥 부분을 가리킨다! 신약은 결코 지옥을 바깥 어두움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지옥에는 어두움이 없고 오히려 불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내려오심(파루시아)을 언급하는 시편18,9-11절이 묘사하는 바와 같이 주님이 내려오실 때, 그분 주위에는 어두움이 있을 것이며, 안에는 영광스러움이 있을 것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는 그 노예가 한 탈렌트를 지혜롭게 사용할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함을 가리킨다! “이를 갊은 특별히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소홀함으로 말미암아 겪는 손실에 대하여 통탄함을 가리킨다. 그는 불의 형벌을 통과하지는 않을 것이나 권위와 기쁨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여기에는 상호 관련된 중요한 세 가지 것들이 있다. 그것은 피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비록 이런 관계를 다루는 명백한 구절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 생활과 체험에서 발생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셋 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다! 피와 십자가는 과거의 일인 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장래의 일이다!

 

그러나 보혈은 심판대의 맞은편에 있다. 피와 십자가를 지나쳐 버리는 자, 곧 피와 십자가에 의해 처리 받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십자가를 지나쳐 버린다면, 그는 적어도 피를 통과해야 한다.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를 갖기 위하여 피와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한다.

 

피는 객관적인 것으로 씻음과 구속과 속죄를 위한 것인 반면, 십자가는 주관적인 것으로 죄와 자아와 옛 사람과 세상과 옛 창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이다! 피는 죄들을 처리하고 십자가는 죄의 능력을 처리하는데, 죄의 능력은 결코 씻어질 수 없다! 피는 죄들을 사할 수 있으나 죄들을 다시 범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 세상, 육체 모두가 십자가의 처리를 필요로 한다.

 

피는 죄들의 사함을 가져오지만, 십자가는 구출을 가져온다! 우리는 우리가 피 아래를 지날 때와 십자가 위에 있을 때에만 심판대 앞으로 담대히 나올 수 있다! 주님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한담, 우리의 의도, 우리의 일, 우리가 하지 않은 채 남겨둔 일을 빠짐없이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실이 되어버린 실패는 피 아래 두어야 한다! 비록 심판대 앞에서의 빛이 강하지만 피 아래 있는 죄들을 드러낼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한담하는 혀를 처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십자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며,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못 박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심판대는 심판할 일들을 찾기 위해 십자가를 수색할 수는 없다! 피에 의해 씻김을 받은 후,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죄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책망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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