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9.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09 조회수1,435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6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코린 9,16-19.22ㄴ-27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복음 루카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신부님 신장이

상당히 작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생각보다 꽤 크시네요?”
크다는 말인지, 작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보통은 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받은 인상보다는 꽤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의 제 키가

크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작다는 것일까요?

사실 크가 크고 작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평균 키가

173Cm라고 하던데,

이보다 크면 큰 키라고 하고

이보다 작으면 작은 키라고

 말하면 될까요?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본당 신부님 이야기가

나왔고 성함을 여쭤보니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창신부인 것입니다.

반가워서 그 동창신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지요.
“그 신부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어요.

거기에 얼마나 성격도 좋아요?”
그러자 그 자매님께서는

얼굴 잘 생기고 성격 좋은 것은

인정하겠지만 키는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 신부는

 마르기는 했지만 거의

180Cm 가까이 되거든요.

하지만 저보다 키가

크지 않다고 주장하시더군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키가 줄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객관적인

 평가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 마음속의

기준에서 나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의 주관적인

기준이 반영될 때는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비교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예쁜

커피 잔이 하나 있습니다.

 클까요? 작을까요?

아마 어떤 분은 크다고

 또 어떤 분은

작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커피

잔보다 큰 머그잔을

보여드리면서

“그러면 이 잔은 클까요?

작을까요?”

라고 물으면 분명히

“크다.”라고 외치겠지요.

그렇다면 커피 잔보다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보여드리면 어떨까요?

“작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머그잔들 중에서는

 조금 작은 잔이고,

에스프레소 잔 중에서는

 꽤 큰 잔입니다.

 먼저 보여 준 커피 잔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크고

작다를 말하게 된 것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나 결정 역시 이렇게

불완전할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크고 작다의 문제가

아니라 크고 작은 것 그 자체를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잘 이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이

크게 와 닿습니다.

눈 먼 이가 앞을 볼 수 없어서

 사람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듯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우리이기에 함부로 판단이나

 단죄를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스스로를 먼저

되돌아보면서 늘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싫어하는

위선자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의인의

모습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을 멈추어라.

대신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을 기억하라.

 상처는 깃털처럼 날리고

가슴에 사랑만 남겨라.

(김은주)

 

너무나 맛있었던 메밀전과 메밀국수.

그런데 맛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ㅋㅋㅋ

"죄의 유혹에 조금도 틈을 주지 마세요"

언젠가 신부님들의 모임에서

 한 신부님께서 담배를 꺼내시며

이번에 새로 나온 담배인데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담배를 핀 뒤로 가래도 줄어들었고,

목 넘김도 부드러워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담배를 피우는

다른 신부님께서

 “그래? 그럼 나 하나 줘봐.”

하면서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오십니다.
다녀오신 뒤에 또 다른

신부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담배를

끊은 지 한 달 쯤 된 상태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 담배 끊었어요.”

라고 말하면서 거절하면 될 텐데,

 모두가 좋다고 피우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나도 한 대 피워볼까?

맛이나 볼까?’
이렇게 해서 담배를 한 대

피우신 신부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되셨을까요?

지금 다시 열심히

담배를 피우고 계십니다.
유혹은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요?

한 번 만, 이번 만, 이 정도는

괜찮아 식의 유혹으로

별 것 아닌 것으로 다가오지요.

그러면서 그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많은 성인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악을 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느 정도 몸을

담그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접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근원부터

 끊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어느 성당의 벽화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