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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루카15,11-32)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12 조회수2,91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6911/주일복음말씀묵상/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루카15,11-32)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참으로 수없이 반복하여 듣고 들은 이야기이다. 나의 매일말씀묵상편의 희년(5-1)”에서도 이를 묵상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게 닥아 온다! 루카15,11-16절까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탕자(蕩子)인 작은 아들은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의 권리, 자기의 자유, 그리고 그 자유로 허락된 자기실현의 가능성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권리나 특히 아버지의 감정에 대해 냉담하고 무감각했다. 그래서 그의 집, 가족, 심지어 자기나라와 동족으로부터 멀리 떠나가서, 오직 자기 자신만의 무분별한 희생물이 되었다. 이 구절에서는 죄와 죄인의 방탕함과 비참함,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그 결과의 달콤함과 처참함이 함께 표현되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집회33,20-24절은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지 말고, 네 재산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라. 네가 아직 살아 숨 쉬는 한, 아무와도 네 자리를 바꾸지 마라. 네 아들들의 손을 바라보느니, 자녀가 네게 청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네 생애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여 죽을 때에 유산을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한다.

 

이 젊은이가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살았다는 것은 자기 민족의 법과 질서를 내버렸다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루카15,15). 돼지는 부정한 동물에 속하기 때문에 돼지를 치며, 돼지들과 함께 먹을 것조차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 그런데 이것조차도 그에게 거절되었다(16) - 사람이 당연히 거부감을 느낌에 틀림없는 최악의 상태를 의미한다!

루카15,16-19절은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이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동기들은 소위 고상한 것들은 아니다! 궁핍 때문에 그는 유약해졌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의 풍족한 생활만을 생각한다. 그가 더 이상 아들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어쨌던 그는 하늘에 대하여, 곧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앞에서 자기가 저지른 짓으로 큰 죄를 지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뉘우친다! 그는 단지 목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떠한 결과도 견뎌내겠다고 마음먹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든 죄인들은 그에게 특별히 부여된 고난의 환경을 만나 삶의 회의가 생길 때, 자신의 생존과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주위의 많은 이들은 구원에 대한 개념조차 없어서 구원에 대한 생각은 물론 구원에 대해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는다.

당신이 주위의 동네 노인회관에 가보면 내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욱한 담배연기, 술과 술 냄새, 화투와 노름, 잦은 언쟁과 다툼, 자식자랑과 음담패설 등 사실 본이 될 만한 것이 별로 없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주님께 돌이키면, 어떻게 구원을 얻으며 구원받는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고 물어보면, 다 자기 나름대로 구원받는 방법을 말한다. 아마도 백 명의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백 가지의 구원받는 방법이 있을 법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구원에 대하여 각각 자기 나름의 생각과 평가를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의 탕자에게도 그가 생각하는 구원의 방법이 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는 나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때 나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재산을 다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불효자이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의 돈을 한 푼도 더 쓸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염치없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부자이시고 품팔이 일꾼들을 고용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버지께서 다른 품팔이를 고용하듯이 저를 고용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야지하고 생각했다.

 

! 탕자의 관념에서, 구원은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었다! 구원받는 방법에 대한 죄인의 생각은, 내가 한 만큼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일을 한 만큼 보수를 달라는 것이다. 일한 만큼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들이 아니라 품꾼이다!

 

20-22절은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라고 말한다.

 

탕자, 곧 작은 아들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동안 생각했던 그 다음 말을 아버지께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버지께서 종들에게 말씀하셨다! 알렐루야!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구원은 나의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사람의 생각하는 바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하는 바에 따른 것이다! 만일 탕자의 생각대로라면 그는 다만 품꾼이 될 뿐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율법으로 가득하다! 생각하는 것은 전부 내가 한 대로 얻는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돌아온 탕자, 곧 복음 안에 있는 자녀들은 찾으신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정을 아신다! 그분은 하느님의 깊은 것이라고 통달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분명히 이미 오랫동안 잃은 아들을 목을 빼고 내다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자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연민이다. 그 늙은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향해 뛰어 나간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목을 안음과 입맞춤은 용서의 표시이다(2사무14,33; 창세45,15).

 

아버지의 용서는 제일 먼저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그 아들은 자기가 말하려고 마음먹었던 것,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모두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아들이 끝까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종들에게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고 말한다.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우는 것은 그가 완전한 자격으로 다시 받아들여졌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이 인간 폐물을 단지 응급조처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을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하며 지금의 그 사람과 그가 지금까지 해놓은 모든 것을 넘어서 그 사람을 끌어올린다. 아들의 돌아옴과 아버지의 용서는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다시 살아났다).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각대로 대하시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대하시는 것임을 이 구절은 보여준다! 만일 구원이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라면 당신은 영원히 하나의 품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을 기념할 때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마땅히 멸망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잔치상에 앉게 하셨다!

 

구원은 나의 생각이나 관점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아들을 보고 가엾게 여긴 사람은 아버지였다!

자비란 무엇인가? 자비는 당신이 아주 낮은 위치에 있을 때 필요한 것이다! 곧 자비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불쌍한 처지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 작은 아들이 구걸하는 위치에 서서 구걸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반듯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돌아온 탕자는 자기가 아들 됨을 감당치 못하고 다만 품꾼의 하나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기를,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볼 때, 구원은 하느님의 풍족함을 나타내는 것이지, 우리의 빈곤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하느님이 얼마나 풍족한 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구원을 어느 정도 깨닫고 이해하면서도 간구할 때에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실지, 사하여 주지 않으실지를 모르고 하느님께 구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본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소유한 부자는 자기 아들이 그의 돈을 얼마만큼 썼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줄 것이 얼마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하느님은 부요한 분이시다! 구원은 하느님이 얼마나 풍족한지를 나타내고, 하느님에게는 우리가 쓰고 또 쓸 만큼 줄 것이 있음을 나타낸다!

 

많은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늘 연약하고 범죄 함으로 당신의 양심마저도 당신이 끝났다고 말한다! 양심은 당신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주지만, 보혈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상태를 어떻게 대하시며, 하느님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말해준다!

우리의 양심은 이미 피 뿌림을 받았다! 양심은 보혈과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피 뿌림을 받은 양심이다! 이것은 눈보다 흰 것이다! 이 보다 더 흰 것은 없다! 알렐루야!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입혀줄 옷이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그 옷을 파는 것을 관심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에게는 당신에게 줄 반지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그것을 전당 잡힐까 걱정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에게는 또한 당신에게 줄 신발이 있으시다! 하느님은 당신이 그 신발을 더러운 물에 빠뜨릴까 걱정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은 반드시 그와 같이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 하느님에게는 하느님의 집에 있는 사람이 쓸 만큼 충분히 주실 것이 있다!

 

15,23절은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라고 말한다.

 

앞 구절의 옷이나 반지나 신은 작은 아들 한 사람이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살진 송아지는 한 사람이 다 먹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즐기는것이다. 오늘 나는 당신에게 새로운 사상, 곧 하느님의 기쁨을 알려 주고자 한다! 나는 내가 구원받은 죽음보다 더했든 고난 중에 있던 그날, 나는 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황홀하고 기뻐서 기쁨의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구원받은 죄인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기쁨, 곧 죄인을 구하신 하느님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죄인 하나를 구원할 때 하느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지 못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보았다면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5,28-30절은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자, 아버지께서 나와서 큰 아들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일해 왔고, 아버지의 명을 소홀히 한 적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가산을 청녀들과 어울려 들어먹은 저 아들이 돌아오니,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 군요.”(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큰 아들의 이러한 태도를 통하여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수군거리는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간접적으로 질책하신다(2). 주님은 그들의 공로들을 깎아내리지도 않고 그들의 업적들을 욕하지도 않으신다. 또한 아버지는 분개하고 있는 맏아들을,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보다 덜 사랑스럽게 대하는 것도 아니다(28,31).

그러나 저 아들은 문자적으로 저 당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나머지 동생과의 형제 관계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큰 아들이 동생에게 했던 것과 똑 같은 태도를 죄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하여 화를 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중에 있는 소외된 자들과 죄인들은 물론 이스라엘 이외의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잔치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던 큰 아들처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가 나와서 잔치에 들어가기를 권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인들은 물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도 함께 식사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에서 제거하여 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이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보낸 초청장이다! 큰 아들은 비록 그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명을 어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결코 없었다고 화를 내었다(29).

 

이것은 큰 아들이 자기가 일 때문에 아버지와 관계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보상을 바라고 아버지를 섬겼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아버지에게 매인 바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그는 이제까지 집에 있는 기쁨을 누려왔다는 것과, 이제는 자기와 함께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15,31-32절은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의 일원으로서 종교 지도자들의 특권적인 위치를 암시하고 있다. 곧 그들은 계약과 율법의 수령자들이며 수호자들이었다(로마3,1-2;9,4).  그들은 화를 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연합하고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기뻐해야만 했다! 잃은 자의 구원이라는 마지막 때의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이로써 영생의 잔치에 스스로를 배제할 위험에 놓여 있다.

 

루카복음 15장에 언급된 세 가지 비유, 곧 잃은 양과 잃은 동전과 잃은 아들에 대해 당신은 깊이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여기에서 이 세 가지를 누가 잃은 것일까? 우리는 그 잃은 양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말하고 그 양이 산속에서 험한 길이나 가시덤불이 있는 길로 들어갈까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잃고 안타까운 목자가 얼마나 더 가련한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잃은 동전만을 생각할 뿐 동전을 잃은 그 여인을 잊었다. 또한 마지막 비유에서도 모두 탕자가 고생하고 처할 곳을 잃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도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그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을 잃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다. 늘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살아온 사람은 정작 아들을 그리워했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우리가 한번 돌아섰다가 순종할 때 하느님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죄인이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얻으셨는가이다!

나 개인의 작은 득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얻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지만 오직 사람의 마음만은 잃을 수 있으시다!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강요하실 수 없다! 주님은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신다. 이러한 탕자 한 사람의 돌이킴이 하느님을 즐겁게 한다! 당신의  작은 순종으로 하느님께서 즐거움을 얻으실 수 있다!

그러므로 헌신은 당신에게 강요하거나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하느님의 즐거움 안으로 이끌고 당신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기묘한가!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즐거움을 드리기를 기도한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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