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9.1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13 조회수2,164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6년 9월 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1코린 12,12-14.27-31ㄱ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복음 루카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상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께서는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셨는데, 어느 날 자신이

누군가와 가깝게 지내면서

옳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 소문을 무시했다고 했답니다.

 내 자신이 떳떳하니까 그런 잘못된

소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문이 사실이니까

냥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따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기쁘게 봉사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아픔만 간직하게 되었지요.
부정적인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공동체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조금만 다르게 본다면,

조금만 서로를 받아주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힘이 빠지게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지금 역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주님 곁으로 가게 되면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아픔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란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기 때문이지요.

즉, 남편 없이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기에 자신의 살붙이라 할 수 있는

아들까지 없어졌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막막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여인의

울음에 예수님 역시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입니다.
바로 자비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볼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이 현대에는 어떨까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계십니까?

못 느낀다면

왜 느끼지 못 하는 것일까요?
이천년 전에 나인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역시도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문제들을 주님께서는

왜 외면하고 계실까요?

여기에서

그 과부와 함께 있었던

 공동체에 주목하게 됩니다.

나인의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부의 아픔에 함께 했고,

함께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나 아니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으로 남의 아픔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큰 사건 사고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함께하고 위로하기는커녕

지금의 상황을 오해하면서

또 하나의 아픔을

추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뜻으로 모여 있는 곳

그리고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 곳에 당신 역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함께 엮이면 피곤하다는 생각,

나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생각,

상대방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혼자서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생각 등이

함께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말씀을 지금

이 시대에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도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의

바람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한 방울에 불과하다.

 함께 모이면

우리는 바다가 된다.

(류노스케 사토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마음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

1964년 동경 올림픽 때,

올림픽을 위해

도로를 신설하면서

어떤 교회가 도로로

편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보상금을

 받을 수가 있었지요.

이제 교회에서는

이 보상금을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교회를

크고 아름답게 짓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이런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헐렸으니

다시 짓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보상금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교회는 우리 실정에 맞게

우리가 봉헌해서

 아담하게 지읍시다.”
실제로 교회를 짓는데

보상금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자신들이 봉헌한 금액으로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도 이 모습을

 원하지 않으실까요?

이렇게 마음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를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다음주에 있을 순교자현양대회 준비를 위해

어제 행사장 주변의 풀을 다 깎았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