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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울지마라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
작성자이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19 조회수1,073 추천수1 반대(0) 신고

제1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12-14.27-31ㄱ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2016년 09월 13일) 울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인’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실제를 만납니다. 바로 죽음과 생명입니다. 서로 상극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먼저 ‘죽음의 무리’가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와 고을 사람들이 죽음을 따릅니다. 이들이 가는 곳은 무덤입니다. 생명의 끝을 상징하는 무덤이 이들이 가는 종점입니다. 무덤에는 기쁨도 희망도 없습니다. 슬픔과 절망의 침묵만이 흐르는 곳입니다. 생명을 삼켜버리는 깊은 심연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생명보다는 죽음의 힘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어제 특히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지진’이라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정부는 ‘세월호' 때와 똑같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죽음을 따른 사람들 앞에 ‘생명의 무리’가 등장합니다.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따르는 제자들과 많은 군중입니다. 많은 무리와 함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는 과부에게 “울지 마라”(루카 7,13)고 명령하십니다. 그러고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과부의 죽은 외아들에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사실을 직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그 슬픔과 하나가 되셨다는 사실을. 과부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나 손익계산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예수님의 이 마음을 닮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들이 살아있는 오늘의 ‘성인’(聖人)입니다. 살아있는 오늘의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 안에서 생명의 힘을 보여주십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생명이요 부활’(요한 11,25)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 안에서 주님은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미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자식을 잃고 울고 있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지 말게 하소서!!!”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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