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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9.22 목/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21 조회수1,588 추천수7 반대(0) 신고




연중 25주 목, 코헬렛 1,2-11; 루카 9,7-9(16.9.22)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Herod's Opinion of Jesus







소유의식과 뒤바뀐 주인 의식을 버리고

하느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찾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늘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나다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내가 따르는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대한 전인격을 건 인식과 삶의 고백이 있어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9,7-8).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헤로데는 스스로 의인으로 인정한 요한을 죽인 죄책감도 있었지만,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분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9,9). 그는 ‘질서와 안보의 이름으로’ 백성을 짓누르고 수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 나라의 의와 하느님의 자비를 삶으로 외치는 예수님의 존재는 큰 장벽으로 여겨졌음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한 것은 단순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세에 걸림돌로 부각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습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헤로데처럼 살 수도 있고, 요한 세례자나 예수님처럼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권세를 통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야말로 왕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은 자신이었고 세상 권세와 힘에 의존했으며 양심마저 무뎌져 요한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코헬렛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1,3)라고 합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며 백성들의 처지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인생의 허무함과 인간사의 무상함, 세상만사의 덧없음을 전합니다. 이런 비판과 경고는 헤로데처럼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무한 우리 인생에 의미가 되어주시고, 무상한 인간사에 영원성을 부여해주시며, 덧없는 인생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채워주시려고 수난을 겪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가치를 하느님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행동과 진리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며 좇는 어리석은 발걸음을 멈추어야겠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헤로데처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될지, 아니면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 삶을 살 것인지 결단을 내리도록 요청받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고 현세 재물과 권세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요,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킬 뿐임을 상기하며, 하느님으로 인하여 행복한 충만한 삶을 이어가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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