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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9.23 금/ 나의 때와 하느님 섭리의 때 사이에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22 조회수1,846 추천수7 반대(0) 신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 코헬 3,1-11; 루카 9,18-22(16.9.23)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루카 9,18)




Peter's confession about Jesus







나의 때와 하느님 섭리의 때 사이에서

코헬렛은 하느님과 무관한 삶의 덧없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고 사람의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으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3,1.11)

세상만사는 우연히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기회 곧 ‘때’(kairos)를 통하여 일어나 일정한 기능을 한 다음 소멸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일어납니다. 인간은 일상의 만남과 일과 현상들 안에서 살아 숨쉬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코헬렛에 따르면 ‘때’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정하신 ‘주어진 기회'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지요. 따라서 인간은 매순간, 그리고 지금 여기서 변함없이 함께하시고 은총을 주시며 길을 밝혀주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그분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때’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어 '카이로스'는 시간의 경과나 과정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때나 기회를 나타내는 초시간적 초공간적 시간이자 영적인 시간으로서 은총의 시간, 하느님 창조의 시간을 뜻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온 인류를 향한 복음의 선포의 시기(마르 1,14-1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시기 또는 기회(요한 2,4),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런 시간은 '영원한 현재'를 뜻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를 살고 있을까요? 그저 하느님과 무관한 물리적인 시간,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시간에 몰두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는 그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 창조의 때, 자비의 때, 은총의 때를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루카 9,18).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9,18.20).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일 뿐 아니라 제자들의 신원과 소명을 확인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때, 곧 구원을 향한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지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고백은 머리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인격으로 헌신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의 의미와 ‘때’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천됨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매순간이 하느님의 때요,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그분과 더불어 실행하는 때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내 거짓 자아를 버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길거리로 나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때’를 삶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9,20)을 고백했으면 합니다. 그럴 때 나의 일상은 은총의 때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빛이 비출 것입니다.

하느님의 때를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발자취를 걷는 것을 말하고, 그분이 직면했던 박해와 수난과 죽음의 ‘때’를 일상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현재'로 바꿔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 내 삶의 중심을 주님께로 옮겨 오직 그분의 창조의 때, 사랑의 때, 은총의 때, 구원의 때를 살아낼 수 있도록 일상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가슴 아프고 고달프고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았으면 좋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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