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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생명나무를 품은 믿음의 종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02 조회수1,645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6년 다해 연중 제27주일


<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


복음: 루카 17,5-10







 예수에게 우유스프를 먹이는 성모



다비드(David, Gerard) 작, (1520), 오크 유화, 35 x 29 cm, 브뤼셀 왕립미술관

 

 

강론을 쓰기 위해 제가 보좌할 때 교사를 했던 지금은 엄마가 된 자매에게 믿음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원했던 것을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들어주셨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매가 결혼하기 전 아는 형제의 신혼집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다른 것은 안 보이고 그 아파트가 너무 좋아보였다고 합니다. 자신도 결혼하면 바로 그런 신혼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파트를 얻으면 집을 어떻게 꾸며야하는지도 혼자 상상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남자친구가 생겨 남자친구가 얻어 놓은 집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 집의 구조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원했던 바로 그 아파트였고 그 라인이었습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자신도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을 어쩌면 주님께서 그 사람이 당신이 정해준 신랑이라는 것을 믿게 해 주시기 위해 잊지 않고 계시다가 그런 감동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런 믿음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어려움이 닥칠 텐데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맺어주셨다는 이 믿음은 삶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합니다. 아마도 당신을 따르는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그렇게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돌무화과나무보고 바다에 심겨지라고 하면 그리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안에 믿음이 없음을 우선적으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더 큰 의미와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통 나무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생명나무가 곧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가 들려져서 어딘가에 심겨지는 모습은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어떤 처녀지에서 아담을 진흙으로 빚어 만들어 에덴동산에 들어다 놓는 모습과 흡사한 이미지입니다. 만약 바다가 에덴동산을 상징한다면 어떤 땅에서 만들어진 한 아담이 생명나무로 바다에 심겨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쯤 되면 예수님께서 성모님에 대한 믿음을 모델로 보여주고 계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신성모님께서는 당신 믿음으로 생명나무인 그리스도를 당신 태중에 옮겨놓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이름이 바다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이 주장을 더욱 강하게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아래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어떤 종이 모든 일을 다 해 놓고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비유 말씀을 하시는 것도 성모님의 믿음을 입증해줍니다. 왜냐하면 성모님 또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이란 바로 겸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느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도 믿음입니다. 믿되 자신을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다보면 하느님 말씀을 덜 믿게 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말씀까지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 믿음은 바로 자신의 주장이 사라질 때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낮아지고 종이 될 때 믿음은 커지게 돼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감소시키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에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을 달라고 청하기 이전에 자신의 겸손 먼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 야곱이 요셉의 초대로 이집트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처음에 자신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파라오가 요셉의 형제들과 함께 보낸 수레를 보고서는 믿게 됩니다. 그래서 짐을 싸서 그 수레를 타고 이집트로 떠납니다. 그런데 가다보니 두려움이 닥쳐옵니다. 주님은 분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물려주신다고 했는데 그 늙은 나이에 이집트로 내려간다면 어떻게 그 뜻이 실현되겠습니까?

이에 브에르세바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묻습니다. 주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하지 말고 이집트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도 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길을 나섭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지만 브에르세바를 기점으로 야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브에르세바까지 내려오는 동안은 자신의 뜻에 의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아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닥쳐온 것입니다. 그러나 브에르세바 이후의 야곱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기에 주님의 종으로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이렇듯 모든 행위에 있어 주님의 뜻을 물어보고 그 뜻에 의해 매순간을 결정해나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볼 때부터 믿음의 사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마치 바다에 심겨지는 무화과나무처럼 야곱 안에 심겨지고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뜻이 곧 그 뜻을 지닌 사람 자신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듯 그분의 뜻을 따르는 종으로 만들어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주님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모델이 바로 성모님이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주님을 당신 안에 모시고 행하는 모든 것들은 이제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것도 당신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확신하고 가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을 주님의 뜻을 묻고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자신 안에 생명나무를 심는 참다운 믿음의 종인 것입니다. 믿음을 증가시켜달라고 청하기 이전에 내가 겸손한 모습으로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물어보고 그 확신대로 살아가는 겸손한 모습이 있는지부터 살펴야겠습니다. 겸손이 곧 믿음이기 때문이고, 그 겸손한 믿음이 주님을 우리 안에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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