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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07 조회수1,500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갈라 3,7-14

형제 여러분,

7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아야 합니다.

8 성경은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내다보고,

“모든 민족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 주었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 루카 11,15-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15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미사 때, 종종 휴대전화

벨소리를 듣게 됩니다.

실수로 전화벨 소리를 진동이나

무음으로 바꾸지 않아서

나는 소리입니다.

솔직히 그렇게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 역시

사람인지라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연세 드신 분이라서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해서

 진동이나 무음으로 변환을 못해서

 미사 때 내내 벨 소리가

울리는 것 역시 이해합니다.

사실 제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알아서 소리를 꺼줍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지에 와서는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안식년 때에 어느 본당에

미사하러 갔다가 조금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미사 중에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뭐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전화를 받으시면서

통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강론 중이라 주위가 조용했었고,

따라서 이분의 통화소리는

모든 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하지 않고 대화를 하십니다.

이때 제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이분에게 있어 저라는 존재가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고,

그래서 제 기분은

점점 더 안 좋아졌습니다.

문득 주님의 심정은 어떠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미사에 참석한 것인데,

주님을 보지도 또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모습에서

님 역시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 드시지 않을까요?

 우선순위의

일 번이 되셔야 할 분이

 뒤로 밀렸다면 어떠셨을까요?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종종 발견합니다.

전화뿐만이 아니라,

대화 가운데에서도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 함부로 말하는 모습이

바로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

모습에서 사랑의 주님께 대한

우선순위도 낮아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지냅니다.

묵주기도성월을 맞이해서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따라서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성모님께서는 늘 하느님께

그래서 육화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이겨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나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무시하고

 세상의 것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그래서 묵주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서로의 가슴을 향해 난 길,

그 길밖에는 이상적인 도시로

 가는 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스리 오로빈도)

묵주기도의 성모와 예수님.

진정한 만남이 중요합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페이스북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SNS(Social Network Services/Sites)

서비스라고 하지요.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입니다.

그러한 관계망을 구축하는데

왜 고독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실험 결과 “직접 대면

교류의 비율이 높을수록 고독을

덜 느끼고, 온라인 교류의 비율이

높을수록 고독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라는 것입니다.
고독을 없애기 위한 서비스가

오히려 고독을 배로

늘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러한 예를 말합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친구끼리

풋볼 시합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익한 일이지만 풋볼 시합 같은

직접 대면이 아닌 소셜 미디어

자체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유익하지 못한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직접 만나고 직접 대화를

해야지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의 기계를

통한 만남보다는 직접 얼굴을 대하는

 만남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직접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으면 합니다.

나를 건강하게 해 줄 사람,

그런데 그들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직접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내 사랑의 대상이고,

나를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의 의자가 이렇게 비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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