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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09 조회수1,287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6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2열왕 5,14-17

그 무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1

4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16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래도 나아만이 그것을

받아 달라고

거듭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다.
17 그러자 나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2독서 2티모 2,8-13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루카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새벽 묵상 글을

쓴 지가 벌써 16년째입니다.

긴 시간을 썼다는 말과 함께

대단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스스로를

대단하다면서 자화자찬

했을 때가 한 10년째

쓰고 있을 때 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도 변하는 시간 동안

매일 새벽 묵상 글을 썼다는

생각에 스스로

으쓱했던 것이지요.

많이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면서

혹시 면담을 할 수

있냐는 내용이었지요.

이 자매님과

약속 시간을 잡았고,

그 시간에 제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지나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고,

이 자매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본 이 자매님께서

크게 실망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다르시네요.

 너무 젊으세요.

이렇게 젊은 신부님께

제 이야기를 하기가 좀 뭐하네요.”
아마 묵상 글을 10년이나 썼으니

연세 지긋한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40대 초반의

젊은 신부가 눈앞에 있으니

당황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젊은 신부가 뭘 알아서

나를 상담할 수 있겠어?

 괜히 왔네.’라는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상담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만남을 마쳤습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화도 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것이

맞는 것이었는데,

고작 묵상 글 10년 쓴 것으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뒤에 저는 계속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코칭, 교수법, 리더십

프로그램 등을 수강하면서

 저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지낸 지금,

앞서 만났던 그 자매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분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쩌면 정말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니 감사할 일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으로 감사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을 참아내고

노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묵상해 봅니다.

 당시에 나병이라는 병은

치유될 수 없는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을 정도로 철저히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치유된 열 사람 중에서

단 한 명만이 돌아와서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큰 은총을 얻었으면서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그러했던 적이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불평불만이 온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받은 것이 많아도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많은 것들을

바라보기보다,

 내가 손해 본 조금의

것들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을까요?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의 나에서 한 단계

 더 주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곁에서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사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선물까지

얻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늘에 바쳐진

감사의 생각은

 완전한 기도다.

(G.E.레싱)

치유받은 나병환자.

오늘 내가 맡은 배역

(김창완, ‘안녕, 나의 모든 하루’ 중에서)

엉뚱한 상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저한테

장난 좀 쳐보기로 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들께서

아이들 기 살려주느라고

 우리 장군이니,

왕자님이니,

공주님이니,

하고 부르잖아요.

저도 저를 주인공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이고, 주인공님 일어나셨네.”

라고 말하고는 욕실에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짜서 묻히면서

 “우리 주인공님 이 닦으신다.”

라고 하고, 거울을 보면서

“주인공님 눈곱 떼셔야겠네.”

라고 하면서 눈을 비비고,

 “주인공님 외출하시네.”

라고 해봤지요.

 이러니까 괜히 어깨가

으쓱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자고요.

주머니 사정이 영 시원찮으면

, 내가 맡은 주인공은 주머니가

두둑하지 못한 배역이구나,

역할이 그러니

 좀 가벼운 게 자연스럽다,

오히려 캐릭터에는

 잘 맞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걱정거리가 많으면,

이 역할이

고뇌가 많은 설정이구나,

고민들이 어색하지 않구나,

 하고 여기면 어떨까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야 감사할 일도

많아지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인공 역할을 주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인공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흥행이 달라집니다.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여러분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한글사랑~~~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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